이번 이야기는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군마사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차대전 강의동영상으로 최 모라는 사람의 강의가 상당히 유명하고 추천되곤 하는데 실제로는 전사에 대한 지식이 일체없이 이리 저리 엉터리 자료를 짜깁기해서 너무나도 위험한 내용을 퍼트리고 있더군요. 거의 교학사 교과서 수준입니다.
그 강사가 폴란드에 대해 폄하하면서 마치 폴란드가 기병부대가 주역이었고 독일은 기계화전력인 것처럼 날조했고 그렇게 많은 분들이 오해를 하고 있어서, 오래 전부터 독일이 어느 정도로 군마에 의존했는 지를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그 강사는 아마 모 잡지 편집장이 발간했던 엉터리 2차대전사 책을 참조해서 그런 황당한 지식을 갖췄을 겁니다. 폴란드 국민들이 매우 당황하고 있는 엉터리 지식이죠. 엉터리 지식은 이 사진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폴란드군이 포위 당했고 포모르스카 기병여단의 병력 중 250명이 숲에서 기습공격을 했습니다. 독일군 제20 기계화보병사단의 보병이 기습을 받고 혼란에 빠졌다가 급히 투입된 장갑차의 기관총 세례로 폴란드군은 물러났습니다. 이 전투에서 겨우 20명의 폴란드 기병만 죽었고 60여명이 부상을 당하거나 포로가 된 것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독일군 제19 군단의 지휘관 하인츠 구데리안은 폴란드 기병여단이 용감하지만 무모하게 독일전차부대에게 돌격했다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고 왜곡된 기록을 했고, 독일은 외국 종군기자 윌리암 셔러William L Shirer와 인드로 몬타넬리Indro Montanelli를 불러 브리핑을 했습니다.
엉터리 브리핑을 받은 셔러는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자신의 베를린 일기(1941)에 기록을 했고 1959년의 제3제국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The Third Reich에서 “Horses against tanks! The cavalryman’s long lance against the tank’s long canon! Brave and valiant and foolhardy though they were, the Poles were simply overwhelmed by the German onslaught.”이라고 알렸습니다.
그러더니 세계 곳곳에서 이런 그림을 그리며 폴란드의 분전을 기렸는데... 실제로는 폴란드 전사와 너무나도 거리가 먼 왜곡이 되어 버렸죠.
제 전사 세미나에서는 폴란드가 어느 정도로 발전한 국가였고 군사강국이었는지를 매우 자세하게 설명했지만 여기서는 아주 간단하게 데이터만 보여드리겠습니다.
개전 당시의 폴란드군7PT 전차부대입니다.
37mm 주포를 장착해서 오히려 개전당시의 독일주력 전차보다 뛰어난 전력을 자랑했습니다.
The combat experience proved that the Bofors wz 37 anti-tank gun used in the 7TP was able to penetrate the armour of any of the German tanks of the time, including the modern Panzer IV..
당시 독일에서는 모든 전선에서 가장 받고 싶어하던 최강의 4호전차 조차도 관통할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럼 폴란드군의 전력이 어느 정도일까요? 위키 자료에 따르면 이렇다고 하는군요.
Poland:
39 divisions (some of them were never fully mobilized and concentrated),
16 brigades,
4,300 guns,
880 tanks,
400 aircraft
Total: 950,000
비록 대부분이 기관총 무장의 경전차이지만 880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독일군도 폴란드 침공에 동원한 2,750대 중 거의 대부분이 경전차였습니다. 독일은 20mm 기관포의 2호 전차가 프랑스 침공에서도 주력이었습니다.
폴란드 침공사진 중 유명한 사진입니다. 독일공군이 없었다면 이들 중 대부분은 전멸했을 겁니다.
비록 대부분이 기관총 무장의 경전차이지만 880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듯이 독일군도 폴란드 침공에 동원한 2,750대 중 거의 대부분이 경전차였습니다. 독일은 20mm 기관포의 2호 전차가 프랑스 침공에서도 주력이었습니다.
폴란드 침공사진 중 유명한 사진입니다. 독일공군이 없었다면 이들 중 대부분은 전멸했을 겁니다.
근위병이 최강이라던 폴란드군이 무려 400대의 비행기도 보유했군요? 이 간단한 데이터에서 볼 수 있듯이 폴란드도 상당한 전력을 갖췄습니다만, 독일군의 뛰어난 전략전술 그리고 루프트바페의 대활약(폴란드 침공당시 2,315대) 그리고 개전 2주 만에 등뒤를 찌른 소련의 침공때문에 무너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모 편집장과 모 강사가 알고 있는 기병의 폴란드를 상대로 독일과 소련은 36일씩이나(?) 전쟁을 벌였습니다. 막강한 소련을 상대로 동부전선을 엄청난 속도로 돌파하던 독일이 기병정도의 폴란드군을 상대로 진격한 속도를 한 번 보시죠.
기계화전력으로 오해하기 쉬운 독일군은 개전초기에 사진과 같이 뚜벅이와 군마부대가 꽤 많았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폴란드로 진격하는 독일군 모습입니다.
그리고 폴란드를 분할점령한 후에 바르샤바를 승전행진하는 기마부대입니다.
심지어 히틀러 앞에서의 승전행진에서도 군마가 보병과 야포를 견인하고 있습니다.
플라모델 메이커 HobbyBoss의 1호전차 이미지에 개전초기의 독일군 상황이 아주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1995년에 발간된 2차대전 전문 일본잡지에서도 '허상의 도이치 기계화부대'라며 실제로는 말이 많이 사용되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폴란드 기병 이야기만 나오면 제가 흥분하는데 작은 지식을 가지고 뽐내려는 것이 아니라, 당시 폴란드처럼 나라를 잃고 추축국의 지배를 받던 나라, 전차 한 대는 고사하고 현대식 포 조차도 갖추지 못했던 나라의 후손인 우리가, 최선을 다해 분전한 폴란드를 전근대적 국가로 비웃는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무식하면서 용감한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폴란드는 적극적으로 무식한 사람들의 폄하에 대해 해명하고 있습니다. Polish American Journal의 기사 중 일부입니다.
...While the battles at Krojanty and Graudenz ended badly for the Polish cavalry, this was not always the case. on September 1, the same day of the Battle of Krojanty, the German 4th Panzer Division clashed with the Polish Wołyńska Cavalry Brigade at the village of Mokra, about 126 miles southwest of Warsaw. The German 4th Panzer Division lost over 100 armored fighting vehicles including at least 50 tanks. During the thirty-six day 1939 campaign against Poland, Germany lost 674 tanks and 319 armored cars.
However, the mechanized German war machine did prevail over Poland’s mounted cavalry, but it was not because the Poles were ignorant of the nature of tanks or that they could not design a suitable tank.
To view Poland’s cavalry from an historical perspective, it should be pointed out that all of the other major combatants also deployed mounted cavalry during World War II including Germany, France, the United Kingdom, the Soviet Union, and the United States, whose last horse-mounted cavalry charge took place near Morong, the Philippines, on January 16, 1942. Contrary to the myth that the entire German army raced across Europe on modern vehicles, most of Germany’s ammunition and equipment was transported by the Third Reich’s 2,750,000 horses and mules...
그냥 간단하게 요약하면 36일간의 전쟁에서 독일이 폴란드 창기병에게 전차 674대와 장갑차 319대를 잃은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에 기병을 사용하지 않은 나라가 있으면 나와보라는 것입니다.
폴란드침공 시에 부숴진 독일전차 그리고 격추당한 독일 공군기의 사진은 흔하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미 폴란드에서는 전차 에이스도 탄생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1~2호 전차 7대인가를 부쉈죠? 훨씬 많던가요?
마지막으로 폴란드를 무식한 근대국가로 퍼트린 두 사람을 위해 2차대전 당시에 어느 정도의 군마가 동원되었는 지를 위키 자료로 인용해보겠습니다.
독일만 275만 마리를 동원했고 심지어 소련까지 합치면 동부전선에서만 630만 마리 정도가 사용되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군마는 병력수송, 보급과 의무용으로 사용되었고 일부는 정찰, 기습, 대 게릴라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료도 있군요. In two months, December 1941 and January 1942, German Army on the Eastern Front lost 179,000 horses. 단 2개월 만에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18만 마리의 말을 잃었다고 합니다.
본론도 꺼내기 전에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군요. 이제 동부전선에 투입되었던 군마병의 기억을 빌어 당시로 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인터뷰 형식입니다.
동부전선의 독일 군마병
인터뷰 주인공인 위르겐 드로게뮬러Jurgen Drogemuller는 동부전선에서 군마를 관리하고 부상병을 운반하고 파르티잔을 진압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1941년 6월 22일에 시작되었다. 북부, 중앙, 남부집단군으로 나뉘 독일군은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모든 지역에서 소련군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의 북부집단군 29개 사단은 동 프러시아와 폴란드에서 출발해 발트해 연안을 점령하고 레닌그라드를 포위했다.
당시 북부집단군의 기병으로 마차수송부대에 배속된 위르겐 드로게뮬러는, 이후 3년 동안 레닌그라드 남부에서 복무했다. 1941년의 찬란한 승리부터 1944년 여름의 참패까지, 그는 독일군의 승패에 따라 수송부대, 대 파르티잔 부대 그리고 전투부대에서 군생화를 보냈다.
"저는 전쟁에 대해 별로 말할 것이 없습니다. 제가 되고 싶어서 군인이 된 것도 아니었고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서 부대명이나 전우의 이름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어쨌든 기억나는 것은 대답하겠습니다."
MH : 언제 태어났나요?
드로게뮬러 : 1919년, 좋은 해였죠. 1차대전이 종전한 해입니다.
MH : 아버님도 참전용사인가요?
드로게뮬러 : 예. 베르덩에서 두 번 부상당하셨죠. 다행히도 큰 장애없이 무사히 귀향하셨습니다. 1943년에 다시 징집되었지만 2차대전에서 살아남으셨습니다.
MH : 1920년대 어린시절 기억이 나나요?
드로게뮬러 : 인플레이션이 대단하던 시기였죠. 일상용품에 수 십 억 마르크를 지불했습니다. 우리는 메클렌부르크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포탄을 해체하는 군수공장에서 일하셨죠. 주급을 받는 금요일마다 어머니와 함께 기차역으로 가던 기억이 납니다.
바로 상점에 가서 식료품을 사야 했습니다. 이튿날이면 그 돈으로 아무 것도 살 수 없으니까요. 아버님이 실직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그 분은 근면성실한 분이었습니다.
MH : 독일국민이 생활고때문에 연합국을 원망했나요?
드로게뮬러 : 미국에 대해서는 악감정이 절대로 없었습니다. 프랑스에 대해서는 1차대전때문이 아니죠. 알자스-로렌 분쟁과 같이 오래된 앙금입니다.
MH : 1930년대 초의 정치격동을 기억합니까?
드로게뮬러 : 그 당시에는 아직 소년이었지만 조국의 혼란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1932년에 2가지 선택권이 있었죠. 그는 아돌프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거나 좌파정권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공산당은 영향력이 대단했고 많은 사람들이 공산정권을 우려했습니다. 그 당시에 히틀러는 독일에서 가장 인기있는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는 배경조직도 좋았고 그의 약속에 많은 사람이 귀를 기울였습니다.
(참조: 나치와 공산주의자는 1932년 당시에 분열되어 있던 독일국회 중 가장 큰 당이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쿠르트 폰 슐라이허 장군의 제안을 거부했다. 슐라이허 장군은 공산주의를 제외하는 대신에 사회민주당과 함께 중도좌파 연합정부를 구성하자고 제안했었다. 노쇠한 대통령은 우파연합 정부가 나치당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는 보수파 정치인의 장담을 믿고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MH : 1930년대의 독일은 어떤 상황이었나요?
드로게뮬러 : 일자리가 있었으니까 행복했죠. 제게는 아름다운 시기였습니다. 히틀러 청소년단(유겐트)에 있었습니다. 14~18살의 동년배들이 함께 있었는데 지원방식이었고 소년들이 그 나이에 즐길 것들이 많았죠. 스포츠와 음악이 있었고 저는 큰 북을 두들겼습니다. 야외행진도 했고 노숙을 하며 자연에 대해 배웠습니다. 숨바꼭질 게임도 즐겼죠.
MH : 말씀하신 놀이 중 일부는 군사훈련으로도 볼 수 있겠는데요?
드로게뮬러 : 그렇죠. 그래도 수류탄이나 소총은 안 들었습니다. 공기총 사격을 배웠습니다. 글라이더를 만들어서 얼마 없는 언덕 위에서 날리곤 했습니다. 저도 날렸는데 재미있었죠. 히틀러 청소년단은 나치당이 운영한다는 점만 빼면 큰 여름캠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MH :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상당한 혜택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치 사상주입도 있었나요?
드로게뮬러 : 예. 수업이 있었지만 저는 기억이 없습니다. 그냥 점심 후의 축구가 훨씬 재미있었죠. 대부분의 소년은 뉴스나 정치에 대해 일체의 관심도 없었습니다. 1934년에 15살이었고 놀이가 가장 중요할 때였죠. 17~18살이 되면 관심은 소녀에게 향합니다. 뉴렌베르크 유대인 혐오법이 있었는지도 몰랐습니다. 1930년대에 유대인이 독일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알았지만 이상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많은 사람이 이민을 갔고 제 삼촌도 1928년에 미국으로 건너갔으니까요.
MH : 일부 역사가는 독일국민이 나치의 유대인, 집시와 소수민족에 대해 획책하던 일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드로게뮬러 : 그렇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개전 후에 에스토니아에 있던 1943~44년 겨울이 되어서야 실상을 알았습니다. 그것도 직접 본 것은 아니었고 소문을 들었던 것입니다.
MH : 언제 입대를 했나요?
드로게뮬러 : 전쟁이 발발한 1939년입니다. 독일군의 기본훈련은 엄격했습니다. 미군의 해병대 훈련과 비슷할 겁니다. 물론 군악에 맞춰 분열과 사열훈련도 했습니다. 독일군은 모든 훈련을 거쳤습니다.
제 오른쪽 새끼 손가락이 굽어서 경례를 제대로 못 했습니다. 상관은 손가락의 신경을 끊어서 곧게 펴게 만들려고 했죠. 다행히 수술 전에 신경이 되돌아왔습니다. 새끼 손가락은 지금도 굽었지만 문제없습니다.
MH : 어느 부문에서 복무했나요?
드로게뮬러 : 농장에서 일한 적이 있어서 말을 다룰 줄 알았죠. 기병에 편입되었고 승마에 대해 제대로 배웠습니다. 영국식이었죠. 그리고 말을 제대로 간수하는 법도 배웠습니다.
탄약마차와 야포를 견인했기 때문에 여러 마리를 다루어야 했죠. 그리고 보병의 수송마차와 굴라시 대포Goulash Cannon(헝가리식 스프)라고 불렀던 야전 취사장도 견인했습니다.
(1차대전 오스트리아군이 사용하던 야전 취사장입니다. 2차대전에도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재현놀이에 나타난 야전취사장입니다.
MH : 전격전(블리츠크리그)는 기계화부대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 독일국방군은 계속 말에 크게 의존했죠?
드로게뮬러 : 예. 그나마 대부분의 병사는 걸었습니다. 러시아에서는 보병의 짐을 실어 나른 덕분에 하루에 20~30km를 행군할 수 있었죠. 우리 군대의 행군속도는 굉장히 빨랐습니다.
MH : 1941년 소련침공 당시에 목격한 것을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드로게뮬러 : 소련군은 포켓에 갇히면 항복했습니다. 러시아군 포로의 행렬이 길게 늘어졌는데 포켓에서 나왔다는 것만으로 행복해 했습니다.
도로 옆에는 파괴된 전차가 마치 괴물처럼 놓여 있었습니다. 60톤의 괴물전차도 봤었는데 포탑만 2개로 아군 전차보다 승무원도 2배나 많이 탔죠.
(이 분이 봤다는 소련의 괴물전차입니다. T-35나 SMK로도 생각할 수 있는데 T-35는 톤수가 많이 모자라고 포탑이 2개라고 하기에는 좀 더 많습니다. SMK는 테스트용 차량이어서 실전배치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독일군이 노획한 T-35 전차입니다. 화력은 당시 독일군 전차에 비해 압도적으로 우위였지만 기동력이 워낙 부족해서 큰 위협은 아니었습니다.
개전초기 소련군이 사용한 괴물전차들입니다. KV-1이 독일군에게 준 충격과 공포는 대단했습니다. IS-2부터는 독일군의 전차전력이 붕괴된 상태라 큰 충돌이 없었습니다.
MH : 소련 시민은 요제프 스탈린의 치하에서 행복하지 않았죠. 시민들이 당신을 환영했습니까?
드로게뮬러 : 사람들은 밖으로 나와서 마을에 들어온 우리에게 꽃을 던졌습니다. 러시아 역사에 대해 안다면 러시아 민족의 슬픈 역사를 알 겁니다. 처음에는 차르에게 그리고 그 다음에는 공산당의 압제를 견뎌야 했죠. 그들은 한 번도 자유로운 적이 없었고 지금조차도 그들이 자유로운 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MH : 배속된 부대가 언제 수송작전에 투입되었나요?
드로게뮬러 : 장교가 제작한 지도(1941년 8월~10월까지의 작전범위)를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북부 집단군과 함께 레닌그라드 부근에 주둔했습니다. 말에게 씌우는 덮개가 충분해서 큰 도움이 되었죠.
최전선의 많은 아군은 동상에 걸려서 발이 썩었고 절단해야 했습니다. 최전선대신에 수송을 맡아서 다행이었죠.
MH : 1942년 여름공세에서도 수송부대였습니까?
드로게뮬러 : 예. 당시에는 상황이 안 좋았죠. 레닌그라드의 교회탑이 바로 앞이었는데 거기에서 멈췄습니다. 남쪽에서는 볼가강의 스탈린그라드까지 전진했습니다. 그곳에서 벌어진 일은 다들 알 겁니다.
1942년에 우리 부대는 말을 건네주고 대게릴라 부대로 전속되었습니다. 저는 다행히도 첫 번째 휴가를 받았죠. 형 한스-마르틴도 휴가를 받았습니다. 그는 공수부대원이었고 1941년에 크레테에 참전했습니다. 휴가에서 형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는 1943년 7월, 시실리에서 전사했습니다.
(사진은 제8 SS 사단의 독일군마병입니다. 이들은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폴란드 등에서 민간인과 게릴라전에 투입되어 악명이 높았습니다.)
MH : 새 부대에 대해 더 말해주시죠.
드로게뮬러 : 나이가 많은 오스트리아군의 빈 보병연대였습니다. 독일군 편제로는 제134 보병연대로 기억합니다. 나이 든 오스트리아인 부대였는데, 그렇다고 노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대부분 기혼의 30대였습니다.
제가 중대에서 가장 어렸고 순수 독일혈통이었죠. 대부분은 빈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복무기간 중에 가장 좋았던 시간이었는데 군기가 완전히 빠졌죠. 음식도 아주 좋았습니다.
MH : 어떤 임무를 받았나요?
드로게뮬러 : 의무장교가 저를 의무병으로 지명하고 교육시켰습니다. 민스크에서 레닌그라드까지 연결된 철로를 순찰하는 임무였습니다. 순찰은 2인에서 중대 전체가 투입되었습니다. 게릴라(파르티잔)을 찾아서 공격하는 임무입니다. 다행히도 게릴라는 거의 만나지 못했습니다. 중대는 기관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했습니다. 중대원은 마우저 98k 소총을 가지고 다녔죠. 저는 벨기에산 자동권총을 지급받았습니다. 아주 작은 놈이었죠.
MH : 파르티잔을 만나면 어떻게 되나요?
드로게뮬러 : 전투가 벌어지죠. 한 번은 중대전체가 다리로 이동하던 중이었습니다. 농장들판에 부상입은 소가 있었고 중대장이 제게 죽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다가가서 총을 쏘는 순간에 일이 벌어졌습니다. 파르티잔이 근처 집에 숨어있다가 기습을 했고 제 주변에는 총탄이 빗발쳤죠. 저는 의무병 배낭 외에는 몸을 가릴 것이 없었습니다. 머리 위에 올리고는 전우에게 조금씩 기어가서 부상병을 돌봤습니다. 중대장과 여러 명이 전사했습니다. 공군을 호출해서 집을 폭격했습니다.
MH : 러시아에서의 야전생활은 어땠나요?
드로게뮬러 : 모두 이가 있었죠. 저녁이면 옷을 벗어서 담뱃불로 지져서 죽였습니다.
MH : 독일군은 이상한 색깔의 이는 의부부대에 제출하도록 되어 있지 않았나요?
드로게뮬러 : 예. 그렇습니다. 어떤 것은 열병을 일으키죠. 예방주사를 놓아주곤 했습니다. 의무병으로 여러 일을 했습니다. 러시아 시민이 도움을 요청하곤 했는데 한 소녀가 지뢰를 밟았었죠.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붕대를 감아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러시아 시민은 고마워하며 달걀, 빵과 집에서 만든 보드카를 주었습니다.
MH : 보드카 맛이 어떻던가요?
드로게뮬러 : 아마 안 좋았겠죠. 저는 강한 술은 못 마십니다. 맥주만 먹죠.
MH : 대 게릴라 부대에서 얼마나 오래 있었습니까?
드로게뮬러 : 1943년 가을이 되자 상황이 매우 안 좋아졌습니다. 특수임무 지원병을 뽑았는데 저는 당연히 손을 들었습니다.
MH : 절대로 지원하지 말라는, 병사의 철칙을 어겼군요?
드로게뮬러 : 상황이 악화되면 누구나 지원할 겁니다. 어느 군대에서나 당연하게 지원하게 될 겁니다. 에스토니아로 전속되어 게릴라 전투에 대한 교육을 담당했습니다. 우리 자신이 게릴라가 되어 더 효과적으로 게릴라를 진압할 수 있게 되죠. 에스토니아는 게릴라 위협의 거의 없어서 교육하기에 좋은 장소였습니다. 우리가 쿠를란트Courland라고 부르는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러시아인에 대한 반감이 대단했습니다. 독일인이 많이 살았죠. 제 먼 친척 어르신도 차르정부의 초청을 받아 오래 전에 라트비아에 정착하셨습니다.
MH : 특수훈련을 받았습니까?
드로게뮬러 : 스키훈련은 정말 좋았죠. 한 번도 스키를 탄 적이 없었는데 오스트리아사람의 도움을 받아 스키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이중 위장군복을 입었는데 겉은 회색, 안은 흰색이었죠. 주위에 따라 뒤집어 입었습니다.
에스토니아에서 5개월 동안 훈련을 시켰습니다. 1944년 초였는데 상황은 최악이었죠. 소련군이 공세에 나섰고 저도 전선에 배치되었습니다.
MH : 전투 이야기를 해주시겠습니까?
드로게뮬러 : 전차는 한 번도 못 타봤고 보병부대였습니다. 참호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죠. 우리는 천천히 밀려났습니다. 러시아군은 처음 2줄만 무기를 가진 채로 공격해온 적이 있었습니다. 앞 열이 죽으면 뒷 열이 무기를 집었죠.
우리도 너무 추운 날씨때문에 조준장치가 제대로 동작하지 않았습니다. 기관총 기름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서 나프타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소련군 무기를 사용했습니다. 그들은 아주 훌륭한 원통탄창의 자동소총(PPSh-41 기관단총)을 가지고 있었죠.
제일 무서운 무기는 스탈린 오르간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야포처럼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광범위한 지역에 로켓탄을 퍼부었습니다.
MH : 적군(소련군)과 격전을 벌인 것같군요?
드로게뮬러 : 한 무리의 포로를 잡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 중 한 명이 제게 "이봐! 꼬마야. 나 몰라? 내 집에 있었잖아"라고 말을 걸더군요. 몇 개월 동안 그의 집에 머물면서 함께 식사를 하곤 했었죠. 그는 소련군에게 해방되었고 바로 징집되었다고 말하더군요. 동료에게 그를 잘 안다고 했더니 풀어주더군요.
MH : 동부전선에서는 어느 쪽이던 포로가 되면 위험하지 않았나요?
드로게뮬러 : 소련군에게 포로가 되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었죠. 총살당하거나 시베리아행입니다. 소련군이 아내의 형부를 포로로 잡았는데 종전 후 10년이나 잡아두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운이 좋았죠. 대부분의 포로가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아군에게 잡힌 소련군 신세도 마찬가지였죠. 포로처형은 제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MH : 보급은 충분했습니까?
드로게뮬러 : 예. 동부전선에서는 충분히 먹었습니다. 후방에 있을 때에는 초콜렛, 위스키와 담배를 구입할 수도 있었죠. 1940년에 영국군이 후퇴하면서 덩케르크에 남겨둔 영국 담배가 기억납니다. 최전선에 있을 때에도 통조림을 먹은 적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드로게뮬러는 극히 드문 경우입니다. 최전선의 병사들은 심각한 보급난을 겪었고 포위당한 부대는 말을 잡아 먹어야 했습니다.)
MH : 적군이 1944년 6월 3주차에 여름공세를 시작했을 때에 어디에 계셨나요?
드로게뮬러 : 1944년 6월 18일에 부상을 당했습니다. 라트비아와 러시아 중간의 국경지대에서 포격을 당했죠. 바로 옆에 있던 전우는 왼쪽 어깨에 파편을 맞아서 즉사했습니다. 저는 항문 부근에 파편을 맞았고 중상을 입었습니다. 걷는 것은 물론이고 앉을 수도 없었습니다.
의사가 파편을 제거했고 리가로 후송시켰습니다. 배를 타고 동 프러시아로 다시 후송되었다가 라이프치히 군병원에 입원했습니다. 1944년 7월이었죠.
MH : 부상으로 전역했나요?
드로게뮬러 : 아닙니다. 회복하면서 2주간의 휴가를 받았습니다. 9월에 다뉴브강의 하인부르크로 배치되었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국경지대였는데 동부전선 오스트리아 연대의 고향이었습니다.
MH : 그 당시에 무슨 계급이었나요?
드로게뮬러 : 병장(Obergefreiter)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가 인접한 보헤미아 숲의 군사학교에서 전속되었습니다. 파르티잔 훈련을 시켰습니다. 숲에서 지내며 위장술과 게릴라전 교육을 받았습니다. 지휘관은 종교인이었고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던 사람이었죠.
그는 "화음으로 음악이 만들어진다(팀웍이 중요하다)"라는 말을 즐겨 썼습니다.
(독일군의 훈장과 계급에 대해서는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zf4656&logNo=70150134535 를 참조하시면 됩니다.)
MH : 연합군이 독일을 점령한 후에도 게릴라전을 계속 하겠다는 건가요?
드로게뮬러 :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미군과 영국군은 아직 프랑스에 있었고 소련군은 폴란드에 있었으니까요.
MH : 제3 제국이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는데도 최전선으로 보내지 않았다니 놀랍군요?
드로게뮬러 : 게릴라 훈련은 생명보험같은 것입니다. 이런 저런 훈련을 계속 받았습니다. 종전 때까지 그 부대에 있었죠. 앞에서 음식에 대해 말했었죠? 오스트리아 린츠에 막사가 있었는데 주변의 농부가 애플 사이더(쥬스의 일종)을 주곤 했습니다.
헝가리 부대가 지나면서 막사 지하에 햄과 베이컨을 걸어두곤 했죠. 몰래 들어가서 배불리 먹곤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고칼로리와 콜레스테롤 걱정이 없었으니까요.
MH : 언제 항복했습니까?
드로게뮬러 : 1945년 5월 8일에 종전되었고 미군 포로수용소로 갔습니다. 위치는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무기를 반납하고 텐트를 우리가 세웠습니다. 우리를 부르더니 문서를 주더군요. 대부분 얼마 안 있다가 풀려났고 저는 다뉴브강에서 떨어져 나왔습니다. 독일 북부에 사는 전우와 함께 로겐스부르크까지 100km를 걸었습니다. 도중의 농부들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들은 음식과 잘 곳을 마련해주었죠. 로겐스부르크에서는 기차를 타고 마인츠까지 갔고 다시 하노버를 거쳐 함부르크로 갔습니다. 고향에는 어머님의 생신 전날인 6월 25일에 도착했습니다. 다행히도 고향은 영국군이 점령했고 소련군 지역에서 불과 8km 밖에 안 떨어졌습니다.
MH : 소련군과 마주쳤습니까?
드로게뮬러 : 영국군만 있었고 그들도 잘 대해주지는 않았습니다. 16살의 제 동생을 강제노역을 시켰습니다. 그 아이는 히틀러 청소년단의 꼬마였을 뿐입니다. 영국군은 알루미늄 격납고 안에서 작업을 시켰고 여름 열기 때문에 많이들 쓰러졌습니다. 아마 영국군이 먹을 것은 제대로 주었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지만 동생이 9월에 집에 왔을 때에는 39kg 밖에 안 나갔습니다. 어머님이 오트밀을 아기에게 먹이듯이 떠 먹여야 했습니다. 다른 음식은 소화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회복하기까지 오래 걸렸죠.
MH : 전후 독일의 삶은 어땠나요?
드로게뮬러 : 살기 힘들었습니다. 배급표로 한 주에 빵 250g과 버터 50g을 살 수 있었습니다. 암시장이 성행했죠. 담배와 커피를 원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있었습니다.
MH : 일자리를 얻었나요?
드로게뮬러 : 예. 일자리가 있었습니다. 미국으로 이민오기 전까지 연구기관의 정원사로 일했습니다. 1948년에 가족이민을 신청했고 많은 서류작업을 거쳤죠. 다행히 아저씨가 미국에 있었고 초청을 받았습니다. 1952년에 미국에 왔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미국은 정말 살기 좋은 나라였습니다.
MH :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나요?
드로게뮬러 : 후방에서 주로 보낸 것은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다른 전우가 많이 죽었는데도 저는 살아 남았죠. 이상한 말이겠지만 지도급 인사들보다 운이 좋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양한 국가의 기병사진을 소개합니다. 물론 2차대전 당시이거나 재현한 것입니다.)
체코 기병입니다.
루마니아 기병입니다.
개전당시 프랑스군 기병입니다.
1937년 모스크바를 행진하는 쿠반 코사크 기병입니다.
코사크 기병은 독일과 소련 양쪽에서 요긴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전쟁 말, 설원에서 나타난 코사크 기병은 독일군 패잔병에서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몽골 기병입니다. 만주에서 일본군을 상대했습니다.
필리핀 주둔 미군 정찰병입니다.
시실리에서의 미군입니다. 제3 보병사단 휘하의 기마정찰부대는 말 143마리와 노새 349마리를 가지고 있었다는군요.
독일에 지원한 코사크 기병입니다. 독일 기병자료는 너무 많아서 2장으로만 끝내겠습니다.
괴물 수송기 ME-323이 군마를 수송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키지 않지만 일본군 기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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