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근대/7년전쟁

돈으로 살 수 있는 최고의 군대, 헤션(Hessian) 군

by uesgi2003 2011. 8. 22.

제가 요즘 게을리하지 않고 전사를 잘 정리했더니 휴일인 어제만 해도 300명이 넘는 분들이 찾아주셨습니다.

"에게~ 뭘 그 정도가지고???" 하시는 분들이 많으실텐데...


전사라는 아주 특화된 분야에, 별로 유명하지도 않고 많이 부족한 제 이야기에 330분이나 오셨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입니다.

더욱이 최근에 다음이 방문자 수를 중복이 아닌 유니크(Unique) 수로 집계한다는 점에서 더욱 고무적이죠.

그러니까 저 혼자서도 방문자 수를 하루에 수 백 명씩 늘릴 수 있었지만 이제는 하루에 수백 번을 방문해도 한 명으로 집계되는 것입니다. 


물론, 오시는 분들이 자주 들리시는 것도 아니고 실망해서 아예 발 길을 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전에 비해 많은 분들이 오시니까 더욱 분발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오시는 분의 숫자보다 제게 더 중요한 것은 제 이야기에 관심을 기울여주시는 분입니다. 1,000명이 오시는 것보다 10분이 관심을 보여주시는 것에 더 힘이 납니다. 


여러분이 "오늘도 글이 올라왔네? 열심히 하네"라며 혼자만 생각하시면 제가 하고 있는 일에 자신감을 잃거나 회의감을 가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재미없으면 다른 이야기를 부탁하시거나, 보다 자세한 이야기를 요청하시거나, 격려의 댓글이라도 남겨주시면, 오시는 분들이 그냥 실수로 들어오시는 분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 블로그를 다른 분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인터넷에 있는 기존의 자료를 짜깁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 탄탄한 영문 자료를 번역하고 관련자료를 보완하기 때문에, 역사의 한 페이지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70권이 넘는 Military History 잡지를 뒤적이며 "다음 이야기는 무엇이 좋을까?"..."이건 너무 마이너한데"..."이건 너무 많이 알려져있고" 하면서 고민을 했습니다. 



지난 번 비엔나 공성전에도 잠시 출연했던 독일용병 란츠크네히트가 생각이 나서 이번에는 헤션(Hessian)이라는 독일 용병부대를 번역하고 있습니다. 앞의 용병이 개인으로 돈을 위해 참전했다면, 뒤의 용병은 국가가 대가를 받고 파병사업을 벌이는 것입니다. 


제 자신도 미국 독립전쟁에 프랑스는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참전했다지만 독일은 왜 참전했었는지 궁금했었는데 이번에 자료를 정리하면서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전투보다는 학술적인 내용이 많아서 지루하겠지만, 근대 유럽전쟁 영화에서 독일군(더 정확하게는 프러시아와 헤션 군)의 모습이 나오면 "아! 쟤네들. 내가 잘 알아"라고 뽐내실 수 있을 겁니다. 


헤션(Hessian) , 돈으로 살 수 있는 최고의 군대

 

사업이었을 뿐이다. 헤션 군은 용병으로 먹고 사는 국가의 유일한 자산이었으니까.

 

Dennis Showalter (Military History 2007 10)

 

미국 독립에서 헤션 군을 빼면 뭔가가 아쉽다. 그들은 독립선언문에서 영국을 위해 "살해하고, 파괴하고, 억압하는" 용병으로 악명을 얻었다. 그들은 조지 워싱턴의 군대와 마주치기 전까지는 트렌톤(Trenton)의 주둔지에서 즐거운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마지막의 영화장면 참조) 우리가 알고 있는 헤션 군의 대표적인 이미지는 슬리피 할로우의 머리없는 기병이며, 그리고 최초의 전쟁영화 중 하나인 1909년도 '배신자 헤션 군'부터 거의 모든 영화에서 악당으로 묘사되었다.

최근의 연구조사에서는 이런 전통적인 이미지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헤션 군은 독립전쟁 당시 북미에 참전했던 독일군 중 절반에 불과했고, 학자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 절반 이상의 헤션이 미국에 정착하고 미국시민과 결혼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어쨌든 헤션 군의 이미지는 뭔가가 빠진 상태로 남아 있다. 그들은 느닷없이 미국에 상륙해서 전쟁을 벌인 후에는 종적을 감춰버렸다. 그들이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왜 미국에 와서 상관없는 전투를 벌이며 죽고 죽였는지를 알아야 그들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설명: 1900년대에 칼린이라는 화가가 그린 헤션 보병입니다. 옆의 투구는 18세기 중엽 청동으로 치장된 브룬스빅 척탄병의 군모입니다. 이들이 들고 있는 소총이 전장식으로 좀 허술해 보이지만 숙련된 보병은 1분이 최대 4발까지 발사할 수 있는 무서운 무기였습니다. 모든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먼저, 독립선언문의 헤션 군에 대해 잘못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은 개인차원에서 영국을 위해 복무한 전통적인 용병이 아니라, 군주가 돈을 대가로 군대를 파견하는 지원군(Auxiliar)으로 봐야 한다. 이런 형태의 파병은 국제법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베트남전에서, 미국은 한국 지원군에게 돈과 물자를 지원했다. 사막폭풍 작전에서도, 몇몇 국가는 중동에 군대를 파병하는 대신에 미국의 파병비용을 분담했었다.

 

18세기는 "파병사업(Soldier Business)"이 절정이었던 시기였고 독일이 그 중심지였다. 파병사업은 30년 전쟁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참전국가들은 군대를 모집하고 빌리기 위해 입찰하듯이 가장 높은 금액을 불렀다. 그리고 베스트팔리아(Westphalia) 조약으로 독일의 군소영주들이 영지를 인정을 받으면서 파병사업이 본격화되었다. 작은 신흥국가들은 비싼 수수료를 지불해야 하는 중개인을 통하지 않고 자신들이 직접 군대를 양성하고 강대국과 협상하는 파병사업에 뛰어들었다.


(우에스기 왈: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18세기 중반 이후에 중앙집권 국가형태를 가지거나 국경이 확정되었습니다. 지금의 독일이 된 것도 1871년에 프랑스에 승전하면서부터이고 이탈리아도 1871년에야 통일전쟁이 완료되어 지금의 모습이 됩니다.

30년 전쟁은 유럽의 강대국들이 복잡한 이익을 위해 지금의 독일 영토 내에서 벌인 전쟁으로 독일국민의 1/3이 죽었고 전국토가 황폐해졌지만 제후국에 불과했던 프러시아가 왕국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됩니다.

미국의 독립전쟁이 벌어진 1775~1783 기간은 독일이 국가로 인정받기 100년 전으로 아직 국토가 분단된 상태에서 군대를 파병하면서 받은 돈으로 경제력을 키워 통일의 기초를 마련하던 시기입니다.

우리가 알던 양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이미지와 달리, 지난 비엔나 공성전의 란츠크네히트부터 헤센까지 500년 이상을 용병사업으로 먹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헤션 군을 배출한 헤세-카셀은 원래 백작의 영지였었기 때문에 강대국의 이익에 따라 이리 저리 합병된 복잡한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병사업으로 번 돈을 현명하게 경제재건에 사용해 힘이 크게 성장한 1800년대 초에는 투표로 군주를 뽑는 근대적인 국가형태까지 발전합니다. 1806년에 나폴레옹에게 합병되었다가 1813년 독립했고 1866년에 프러시아에 합병되면서 독일이라는 통일국가의 일원이 됩니다. 지도가 독일어라 쉽게 이해되지 않지만 대략적인 위치는 알 수 있을 겁니다.)

 

헤세-카셀(Hesse-Kassel)은 간신히 먹고 살 정도의 마을이 대부분인 중간크기의 영지로, 프러시아의 중간에 끼어있었으며 강대국의 군대가 오가는 통로였기 때문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피해를 입었다. 모든 영토가 황폐해졌고 정부는 세금을 거둘 곳이 없었다. 그리고 피해를 복구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려서, 군대를 양성하기도 힘들었다. 1676년 당시, 헤세의 군대는 겨우 23개 중대에 불과했다.

헤세 백작 칼(Karl) 10개 중대를 덴마크에 3,200탈레스에 임대를 했고, 1687년에는 한 명당 50탈레스의 가격으로 1,000명을 베니스에 임대했다. 200명도 안 되는 병사가 귀국했지만 워낙 평가가 좋아서 다른 국가에서도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네덜란드는 풍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외국에서 용병을 고용해온 역사가 꽤 깊은데, 칼은 1688년에 오렌지(Orange)의 윌리암에게 3,400명을 파병했다. 그들의 활약에 큰 이익을 본 네덜란드는 더 많은 헤션 군을 장기임대하고 싶어했다


그림 설명: 역사상 최고의 전략가 중 한 사람인 말보로 공작입니다. 대부분의 역사가 영국에 의해 집대성된 탓에 조금 과장되기는 했어도 분명히 천재임은 틀림이 없습니다. 이 분의 이야기도 조만간 다룰 예정입니다. 외모로는 전쟁과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죠?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연맹전투(또는 9년 전쟁, 1688~1697)과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1701~1714)에서, 헤션 군은 화승총 전투의 엄청난 위험에도 불구하고 엄격한 규율을 지키는 동시에 참전국 병사들보다 더 훌륭한 전투력을 발휘해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영국의 말보로 공작(Marlborough, 역사상 최고의 전략가 중 한 사람)조차도 그들을 칭찬했다. 오스트리아의 유진 왕자도 1706 10,000명의 헤션 군을 이탈리아 전투에 데려갔으며 헝가리에서 있었던 투르크와의 전투에도 헤션을 파병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헤션 군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독일의 곳곳에서 모병하거나 징집했으며, 칼 백작은 사업이 아니라 강대국과의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어서 자신의 자치권을 보장받기 위해 군대를 파병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명예를 중요시했다. 칼 자신의 아들 다섯 명도 헤션 군에 복무해, 두 명이 전사했다. 프랑스가 매우 후한 조건을 제시했지만, 칼빈교도였던 칼은 고용인이 개신교도인 경우에만 헤션 군을 임대했다.

스튜어트(Stuart) 가문이 스코틀랜드에서 봉기한 1715년부터 이런 추세가 바뀌기 시작한다. 영국의 조지 1세는 12,000명의 헤션 군을 임대했고, 영국이 오스트리아, 바바리아, 스페인 등과 대동맹(Grand Alliance)에 계속 참여하겠다고 약속한 1726년에는 헤션 군을 가장 먼저 사용하는 조건으로 매년 125,000파운드를 지불했다. 5년 후에는, 당장은 전쟁이 없어 보이는데도 수상이 의회의 허가를 받아 240,000

파운드를 지불하고 12,000명의 헤션 군을 영국 군에 편입시켰다.

 

헤세 백작은 어느 한 국가에 종속되지 않고 고객국가를 늘려가고 싶어했지만 항상 좋은 결과만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1744, 바바리아와의 조약때문에 헤션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서 양쪽 모두에 군대를 파병하게 된다. 이 조약에서 처음으로 사상자에 대해 추가금을 지불하는 피의 대가 조항이 포함되었다. 전장터에서의 헤션 군은 빗발치는 총알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규율로 명성을 계속 높여갔다. 1745년과 1756, 헤션 연대는 프랑스와 스코틀랜드의 침공을 걱정한 영국에 파병되었다. 독일의 윌리암 3세 백작이 "헤션 군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선언할 만도 했다.

7년 전쟁이 터지면서 헤세-카셀의 자원(아무리 그래도 자원이라니 ㅡ.)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일부 영국 의원 과 수상 윌리암 피트(William Pitt)는 용병군대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지만, 전쟁이 터지자 정부예산을 털어 군대를 모병했는데 대부분이 독일병사였다. 1760년에 복무했던 90,000명의 병사 중에서 22,000명만이 영국인이었고 헤션 군보다도 2,000명이나 적었다. 유럽 강대국의 군대와의 전투에서 헤션 군은 다시 한 번 그 가치를 증명했다. 그들은 독일에 주둔하는 영국 왕의 군대로 맹활약을 했고 숫자가 훨씬 많은 프랑스 군을 묶어 두어 프러시아의 프레드릭(Frederick) 7년 동안 전쟁을 벌일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렇지만 전쟁의 대가는 헤션 시민이 치러야 했다. 헤세는 5년 동안 전장터가 되어 점령당하고, 재점령당하고, 탈환되는 동안 양쪽 모두에게 약탈을 

당했다. 세금을 거둘 기반이 점점 줄어들었고 반대로 영국에서 들어오는 파병대가는 점점 늘어났다. 1765년에는 헤세-카셀의 예산 중 절반이상을 파병사업으로 충당했다. 이 돈 덕분에 돈줄을 쥐고 있는 지역의 길드, 귀족, 유지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돈이었다. 초기에는 파병사업에서 번 돈을 군대를 육성하고 유지하는데 사용하다가 다양한 계약을 맺으면서 점차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외화로 들어온 돈을 상업, 공업, 농업에 투자한 것이다. 그리고 돈이 직접 정부의 금고에 들어오기 때문에 점차 권력이 중앙정부에 집중되었다.

 

7년 전쟁 이전에도 헤세-카셀은 마음대로 대외정책을 결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1648년 이후 파병사업이 안정적으로 발전하면서 시민을 쥐어짜거나 긴축재정을 펴지 않아도 전후복구 사업을 벌일 수 있게 되었다. 파병사업 덕분에 정부는 시민에게 의존하지 않고 장기적인 개발 프로그램을 계획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림 설명: 헤세-카셀 영지를 주 단위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파병사업을 벌인 프레드릭 2세입니다. 국민을 사지에 사지에 내몰고 돈을 벌어들이기는 했어도 경제재건에 현명하게 투자해 근대 통일독일의 한 축을 만든 공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림처럼 대단한 인물은 아닙니다만...


18세기 중엽은 전제주의의 계몽버전이 한창일 때로, 왕가와 귀족이 평민에게 공공복지를 시행하는 것이 유행했다. 군주는 자신을 국가와 시민의 보호자로 생각했고 사람과 시스템을 모두 개선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덩치가 너무 커서 지방이나 다른 국가에 있는 영토까지 중앙정부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스페인이나 합스부르크와 같은 나라에서는, 국민이 불만을 가질 때에만 복지를 펼치는 척하며 눈속임했지만, 헤세

-카셀과 같은 작은 나라에서는 중앙정부가 미리 예산을 정하는 현대식 관료주의로 발전했다.

 

정부가 자금줄이 되면서 의회도 정부에 협조하기 시작한다. "부정부패"까지는 아니더라도 "후원"이 공공연해져 헤세-카셀에서는 의원들끼리 서로 교통정리를 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헤세-카셀의 7년 전쟁 후 복구는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정부는 도로와 강 운송시설을 포함한 거의 모든 인프라를 지원해서 국가의 경제기반을 늘리려고 노력했고, 헤션 군의 군복과 무기를 직접 생산하면서 장인과 노동자를 육성했다. 그리고 감자재배와 양 사육을 장려해서 농업을 크게 개선했다. 당연히 시골의 인구가 급증했고 다시 병사자원이 늘게 되었다. 양 사육에서 나온 울을 이용한 섬유산업이 크게 성장해서 노동자들이 매일 고기를 먹고 와인을 마실 정도로 생활 수준이 높아졌다. 수도인 카셀은 공공근로와 건축의 모범사례가 되었다. 외국에서 들어오는 돈으로 학교, 병원, 보육원을 짓고 유지보수했으며 이에 따라 건축가와 건설노동자가 늘어났다. 1760~1784년의 기간 동안 과세는 1/3로 줄어 시민의 부담이 크게 줄었다.


그러나 파병으로 인한 손실이 늘면서, 275,000명도 안 되는 한 주에서 몇 천명의 군인을 계속 만들어내기 힘들어졌다. 프레드릭 2세는 헤세-카셀을 주 단위로 나누고 파병을 위한 야전연대 1, 그리고 국토방위를 위한 주둔연대 1개를 책임지고 만들어내게 했다. 복구가 더딘 지역은 예외를 두었고, 250탈레스 이상의 자산을 가진 사람들은 돈을 내고 병역을 면제받았다. 군수산업과 농장에 반드시 필요한 장인, 견습생, 노동자 그리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도 면제받았다. 이런 경우를 제외한 다른 모든 16~30세의 신체건강한 젊은이는 필요할 때마다 징집되었다.


그림 설명: 헤션 군을 징집하고 있는 모습인데, 가족의 애원하는 모습으로 볼 때에 여기에서 설명한 것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입니다. 아무리 돈을 잘 벌어도 몇 십 년 후에나 다시 만날 수 있고 거의 대부분이 전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죠.


이렇게 해서 헤세-카셀은 숫자와 비율 면에서 가장 병사가 많은 지역이 되었다. 상비군의 규모는 24,000명 정도로 유지되었는데 시민 15명 당 군인 1명의 비율이며 프러시아의 2배나 되는 숫자였다. 프러시아에서는 외국인도 헤션 군에 지원할 수 있었지만, 헤세-카셀은 자국민만을 고집했다. 가구당 군인비율도 프러시아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높았다. 군복무기간은 24년이나 되었는데도 저항은 거의 없었다는 것도 신기할 정도다.

아버지나 삼촌이 아이들에게 군복무에 대해 외국에서의 신기한 경험만을 전해주면서 환상을 가지게 된 것일 수도 있고, 종교의 영향도 있을 수 있다. 헤션 군은 대부분이 칼빈교도인데, 어릴 때부터 의무와 천직에 대해 교육을 받았다. 여기에 군주에 대한 복종을 끊임없이 주입시키고, 엄격한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규율이 가장 잘 잡힌 군인이 만들어진 것이다.

 

헤션 군은 앞에서 설명했던 것과 같이 두 가지 형태로 징집되었다. 우선 규모가 제한되지 않는 야전연대는 신체건강한 무직자와 빈곤층에서 징집되었고, 규모가 제한된 주둔연대는 시민병 형태로 매년 초여름에 3~6주간의 군사훈련을 받은 후에 다시 현업에 복귀해 국내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시켰다. 야전연대에서도 각 대대의 1/3 정도가 한 번에 휴가를 떠나 경제활동을 하거나 농장을 돌볼 수 있게 배려했다. 연대 사정과 전쟁발발 여부에 따라 그 기간은 1년 가까이 늘어나거나 50%까지 확대하기도 했다.

휴가를 떠나지 않은 헤션 군은 사회와 완전히 단절되었다. 시민이나 시민병은 야전연대에 자원할 수 있었고 정부에서도 이것을 권장했다. 그리고 능력을 인정받은 군인의 급여는 일반 노동자나 농부에 비해 높아서 한 달에 소 한 마리 또는 돼지 두 마리를 살 수 있는 정도를 받았다. 덕분에 군인이 생계를 책임지는 비중이 매우 높았다. 그리고 엄격한 초기훈련만 마치면 그 다음부터는 훈련강도가 상당히 낮아져서 빈곤층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잡역을 하는 것보다도 더 수월했다. 그리고 엄격한 규율도 문제를 일으키는 10% 정도에게만 집중되어 평화 시에는 힘들 일이 거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헤션 군은 신병을 모집하는데 어려움이 없었고 많은 병사들은 미국의 시민혁명을 탄압하기 위해 참전하는 것도 모험과 기회로 생각할 정도였다.

 

전쟁이 발발하면, 24개 연대에 "연대 포"로 무장한 2~3개 포병 중대와 몇 개의 기병 대대가 따라 붙었다. 보병연대마다 척탄병 중대가 있었는데 전투 시에는 척탄병 대대에 배속되었다. 미국 원정에서는 야전 엽병(Jaeger)2개 중대가 새로 만들었는데 높은 급여와 모험에 매력을 느낀 사냥꾼과 나무꾼이 자신의 소총을 들고 입대를 했다. 현재의 레인저 특수부대로 볼 수 있는 엽병은 영국군 내에서도 엘리트부대였다.

헤션 군 장교는 명예와 재력을 동시에 가질 수 있는 좋은 직업이었다. 평균 27년을 복무했으며 귀족과 부르조아 집안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프로시아에서는 능력을 중시하기는 했지만, 고급장교는 거의 귀족으로만 채워졌다.

(Karl)은 무능력한 장교의 적체를 염려해 61명의 장교와 사관생도가 헤세-카셀의 최고 대학에서 군사학을 연구하게 했다. 프랑스 혁명 당시, 헤션 장교는 새로운 전술을 연구하는 집단이 되었고, 파병되어 외국인 장군의 지휘를 받아도 연대차원의 지휘에는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게 되었다.

 

헤세-카셀의 "황금시대"도 많은 부작용을 낳았다. 군대의 전력을 계속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정부가 시민의 생활을 간섭하고 통제하게 되었다. 제외대상이 입대를 하면, 그 사람이 자원을 한 것인지 조사가 이루어졌다. 지원병이 부족할 때에는 정부가 임의로 소득수준과 직업을 조정해 숫자를 맞췄다. 출국한 자식에 대해서는 부모가 해명을 했고 고의로 병역을 기피한 것이 밝혀지면 처벌을 받았다.

초기에 협조적이던 의회도 파병사업을 사회와 자신들의 경제기반을 위협하는 존재로 여기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관리형 정부보다 개방경제 시스템을 선호하기 시작했는데 그 영향도 있었다. 1773년 동생들에게는 현금으로 보상하는 농촌의 장자상속법(Primogeniture)이 입법되면서 갑자기 엄청난 수의 청년이 징집대상이 되었고 토지를 매각하거나 저당잡힐 수 있는 권리에 대한 소송과 맞소송으로 심각한 사회문제가 발생했다.

재미있게도 너무 잘 나가는 파병사업때문에 사회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영국정부는 조지 3세의 삼촌인 헤세-카셀 백작과 협상을 맺어 2천만 탈레스를 지급하기로 했는데 유례없이 상당부분을 선금으로 지급했을 뿐만 아니라 대금수준도 영국군과 비슷한 수준으로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다. 그리고 북미 이외의 지역에는 파병하지 않으며 헤션 군이 공격을 받으면 영국 군이 지원한다는 조건까지 붙였다.


그림 설명: 크렌톤에서 기습을 받고 도망치는 헤션 군입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마지막에 있는 동영상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프레드릭 2세 백작은 대서양 건너 미국에 12,000명을 보내기 위해서는 기존의 야전군 외에 4개의 주둔연대를 더 모집해야만 했다. 의회는 이 조약을 지지했고 50만 탈레스 이상이 병사의 가족에게 지급되었다.

그러나 시간은 변하기 마련이다. 유럽과 독일의 지식인과 언론은 계몽주의와 완전히 어긋나는 "인간자원의 거래"에 대해 맹렬히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상자를 대체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 영국 군과 외교관은 미국에서의 빠른 승전을 장담했지만 1776년 이후에는 최초의 약속과 달리 19,000명의 헤션 군이 대서양을 건넜다. 그 중 약 5,000명이 죽었는데 80%가 병으로 죽었으며 1,300명이 부상을 당했고 2,500~3,100명이 행방불명되었다. 행방불명된 병사들은 대부분 미국에 정착을 한 것으로 보인다.

1785년에 칼의 후임으로 백작에 오른 윌리암 9세는 더 많은 청년이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토지상속법을 고쳐서 그 동안의 비난을 잠재웠다. 그리고 복무기간도 12년으로 줄이고 징집 시스템도 그 동안 발전한 사회 시스템에 맞춰 수정했다. 프랑스 시민혁명에 불안을 느낀 윌리암 9세는 파병사업을 줄이려고 했지만, 영국이 더 많은 금액을 기꺼이 지불하려고 했기 때문에 1787 12,000명의 4년 계약을 맺었고 전쟁이 발발하지 않아 결국에는 동원되는 일이 없었다. 그 후에 12,000명의 보병과 포병은 몇 차례 계약이 갱신되었다가 1798년 혁명을 막기 위해 아일랜드에 배치되어 활약을 했다. 윌리암은 1803년에 신성로마제국의 군주로 선출되었고, 3년 후에 제나(Jena) 전투의 여파로 라인동맹에 병합되어 윌리암은 오스트리아로 추방된다. 헤션 군은 유럽 곳곳에서 외국의 군기 아래 계속 싸우다가 독일이라는 통일국가가 건국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참조자료로 미국 독립전쟁 중 조지 워싱턴 장군의 기습을 받는 트렌톤 주둔 헤션 군입니다.

중간에 많이 답답한 장교가 나오는데, 귀족들이 신분을 이용해 장교 자리를 꿰찬 경우가 많아서 실제로도 답답한 상황이 많이 벌어졌던 모양입니다. 


이번 영화는 헤션 군은 아니고 프러시아 군의 전투 모습입니다.

배리 린든이라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걸작 중 하나로 영국 군에서 탈영한 사기꾼이 프러시아 군에서 전쟁 영웅이 되는 전투 장면입니다. 


이번 자료는 동영상은 아니고 헤션 군의 군가입니다. 소리로 들으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