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현대/2차대전

동부전선 기갑전에 대한 미신과 오해 (1부)

by uesgi2003 2015. 10. 27.

 

국내에 무척 제한적인 자료만이 번역출간되다 보니 그 자료가 마치 전부인 것처럼 받아들여지고 그렇게 정리된 카더라 통신이 두터운 장갑을 두르면서 진리로 깊숙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전에도 설명했듯이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 겨울 때문에 실패했다는 주장도 좀처럼 깨트리기 힘든 오해이고 무적 독일전차군에 대한 오해도 타이거만큼이나 단단한 방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부전선 기갑전Tank Warfare on the Eastern Front, 1941~1942, Robert Forczyk의 자료를 인용해서 이런 오해 또는 간과한 사실을 설명해볼까 합니다. 언젠가는 번역출간하고 싶은 책이기는 한데... 요즘 상황을 생각하면 어렵겠죠. 

 

 

 

 

 

동부전선 기갑전에 대한 미신과 오해 (1부)

 

독소전쟁, 그 중에서도 특히 기갑전은 지난 60년 동안 영어권 역사가들 사이에서 인기있는 주제였다. 그렇지만 영미독자들이 동부전선 기갑전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상당부분은 구데리안Guderian의 팬저 리더Panzer Leader나 폰 멜렌틴Mellenthin의 팬저 배틀즈Panzer Battles 심지어 SPI의 팬저블리츠Panzerblitz (1970)와 같은 전쟁게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PC판으로 제가 무척 좋아했던 전쟁시뮬레이션 게임입니다. PC로는 이제 전통시뮬레이션 게임은 안 나오지만 보드게임으로는 여전히 출시되고 있습니다.

제가 이런 게임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팀원이 워크샵 때에 함께 놀겠다고 보드게임으로 사온 적이 있었는데, 뜯지도 못하게 말린 후에 반품시킨 적이 있습니다. PC판은 CPU가 알아서 고생하며 게임법칙을 계산해주지만, 보드게임에서는 두터운 매뉴얼을 참조하며 일일이 계산을 해야 합니다. 매뉴얼 읽고 말판까는 것만 몇 시간이 걸리고 게임은 밤을 새우게 되죠.

 

법칙을 놓고 싸우는 것은 덤입니다. 영문 매뉴얼이니까요.

 

독일전차 숭배문화가 생기더니 모든 독일전차(그들이 사랑하는 타이거와 판터 시리즈)가 모든 소련전차보다 우수했고 적군Red Army은 전차 숫자가 워낙 많았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는 믿음이 굳게 자리잡았다. 이런 주장에는 나름 근거가 있는데, 야만인 적군의 숫자만 강조한 제3 제국의 선전을 굳게 믿은 독일참전병사의 증언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믿음은 동부 기갑전에 큰 영향을 미쳤던 전투전략전술, 작전과 판단착오, 지형과 기후 등의 중요 요소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 소련은 바르바로사Barbarossa 작전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디젤엔진을 생산했지만 독일은 제대로 된 디젤엔진을 개발하지 못했다는 결정적인 요인도 자주 무시된다. 동부전선에서 디젤엔진의 가치가 대단했는데도 말이다.

 

동부전선 기갑전에서는 물자만 생각하기 쉽다. 1941~45년 동부전선에서 사기와 같이 눈에 보이지않는 요인이 전투와 전역의 승패를 결정 지으면서 전쟁 사기는 물자보다 3배의 가치를 가진다는 나폴레옹의 명언이 입증되었다.

육각형 격자로 그려진 2차원 지도 위에 올려진 독일 판터나 타이거는 소련의 T-34에 비해 훨씬 더 인상적이다. 게다가 이런 전쟁게임에서는 독일전차의 장포신 화력과 장갑보호가 큰 가중치를 갖는 반면에 낮은 기동성과 안정성은 아주 사소한 약점으로 계산된다.

예를 들어 판터는 독일군의 기동전략과 달리 장거리 기동작전을 수행하지 못 할 정도로 신뢰성이 낮았다는 점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전술차원에만 집중하는 전쟁게임에서는 T-34의 대량생산과 장거리운행이라는 최대 강점은 계산하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전쟁게임에는 60년 동안의 영미역사가들이 과장한 우수한 독일전차, 움직이는 포대 수준의 소련전차가 등장했다. 냉전도 이런 편견에 한 몫을 했다. 독일참전병사의 증언은 아무런 비판없이 받아들인 반면에 소련측의 기록은 냉혹한 잣대를 들이댔다. 그렇지 않아도 귀한 소련측 증언은 거짓이나 선전물로 평가절하했다.

동부전선 개전 50년 후에 소련체제가 붕괴되었고 소련의 자료가 대거 공개되면서 서방측의 편견도 바뀌기 시작했지만 영어권에서는 아직도 독일측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부전선 기갑전 평가의 또 다른 문제는 지금까지 전술차원만 분석해 왔기 때문에 스탈린그라드나 쿠르스크와 같은 단일 전역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양측 전력의 장기적 추세와 영향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고 있다. 독소전쟁은 46.5개월 동안 계속되었고 어느 한 전투나 전역으로 결정 나지 않았다.

 

전략적 배경

아돌프 히틀러는 역전의 전차사단과 루프트바페 비행단을 투입해 단 한 번의 작전으로 소련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소멸시키려고 했다. 19401218일의 총통명령 21에서, 히틀러는 러시아 서부의 병력을 기갑선봉이 과감하게 팀투하는 작전으로 궤멸시킬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는 적군과 소련의 소멸뿐만 아니라 노골적으로 슬라브민족 말살까지 노리는 전멸전을 선택했다. 폴란드, 프랑스와 발칸반도 전투는 전통적인 독일의 전략이 그대로 진행되었던 반면에, 바르바로사 작전에서는 십자군을 자임하면서 동부전선이라는 거대한 무대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

동부전선은 작전단위 심지어 전술단위로 진행되었고 목표와 방법을 이성적으로 판단해 결정하지 않고 즉흥적이거나 요행을 바라고 결정을 내린 경우가 많았다.

 

 

 

히틀러와 최고사령부는 3가지 가정에 따라 기갑군을 투입했다

먼저 소련에서의 전쟁은 몇 개월이면 끝날 단기작전으로 가정했다. 장기전에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차생산, 교육, 연료와 탄약재고를 늘리지 않았다.

두 번째로 지형과 기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소련을 평평한 스텝지역으로 착각하고 전차가 작전을 벌일 최적지로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많은 강, 울창한 숲, 상상을 초월하는 거리, 오솔길로 얽히고 설킨 지형이었다. 이전의 전쟁에서는 적당한 기후에 탄탄한 도로를 겨우 300~400km만 달려도 되었다. 독일 역사상 단 한 번의 작전에서 500km 이상을 돌파한 적은 없었다. 최고사령부는 겨울이 오기 전에 소련이 붕괴된다는 첫 번째 가정을 세웠기 때문에 기후는 아예 감안하지도 않았다.

세번 째로는 적군을 아주 효율적으로 궤멸시킬 수 있다고 가정했다. 소련군은 핀란드와의 겨울전쟁에서 어처구니 없는 전력을 보여준 데다가 스탈린은 대대적으로 군을 숙청했고 독일정보망도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 탓에, 히틀러는 기동전으로 적군 대부분을 6주 내에 궤멸시킬 수 있다고 계산했다. 초반에 적군 대부분을 궤멸시키면 19406월 프랑스와 같이 소련도 스스로 무너질 것으로 기대했다.

 

이렇게 잘못 세운 3가지 가정은 독일 기갑작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고 진실이 차례로 드러날 때마다 독일기갑군은 수세에 몰렸다. 스탈린은 더 확실한 작전과 병력으로 히틀러에게 한 방 먹일 때까지 어떻게든 독일침공을 막아 내기로 했다. 그는 193911월에 적군의 4개 기갑군단을 해체시켰다가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19407월에 8개 기계화군단 편성을 급하게 명령했다. 그리고 독일의 전차전력에 대응해서 T-26BT 경전차대신에 신형 T-34KV-1 편성을 명령했는데 5,000대를 새로 생산한다고 해도 기계화군단 완편은 1942년 중반에나 가능했다.

그동안 독일은 더 많은 기갑사단을 증편했고, 스탈린도 19412월에 기계화군단을 20개 더 편성하기로 해서 모두 16,000대가 필요했다.

 

 

 

T-26과 BT-7 경전차입니다.

 

하리코프 Kharkov 공장(KhPZ)에서 스탈린그라드Stalingrad 트랙터 공장(STZ)까지 전차생산에 가세했는데도 28개 기계화군단 완편은 1943년 말에나 가능했다. 스탈린이 졸속으로 명령한 탓에 적군의 28개 기계화군단은 매우 부실한 전력으로 독일의 대대적인 침공을 맞았다.

 

적군의 기계화군단도 스탈린과 참모의 3가지 전략적 가정에 따라 배치되고 투입되었다

먼저, 스탈린은 독일침공을 미리 포착해서 충분히 준비할 시간이 있을 것으로 가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군단의 전쟁태세보다는 편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두 번째로 적군의 전력이 독일군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가정했는데, 선공을 받더라도 1939~40년에 합병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지역만으로 충격을 흡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세 번째로 소련은 총산업생산력이 결정적이며, 일개 전역은 내주더라도 장기전으로 전력을 유지할 수 있는 능력으로 승전할 수 있다고 가정했다.

스탈린 개인의 무능력 때문에 첫 번째 가정은 애초부터 물 건너갔고 두 번째 가정도 크게 틀어졌다. 스탈린의 계산착오로 전쟁발발 3개월 만에 소련의 기갑전력 대부분이 궤멸되었다. 그렇지만 세번째 가정은 전적으로 옳은 판단이었고 2년차부터는 두번째 가정도 힘을 얻는 밑바탕이 되었다.

 

 

 

전쟁초기에는 소련전차병이 아무 생각없이 전차를 버리고 탈출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징벌부대 처형을 받으면서부터 전차와 운명을 함께 합니다.

 

다시 말해서 스탈린과 최고사령부는 전쟁위험을 간과한 큰 실수를 저질렀지만 독일과 달리 처음부터 지연전을 준비했고 적군의 기갑전력은 독일기갑전력의 전술적 우위를 상쇄시키는 전략적 우위를 가졌다. 독일 지휘관이 그렇게 비통해하던 소련전차의 수적 우위는 갑자기 준비된 것이 아니라 전쟁이전부터 신중하게 선택한 전략이었다.

 

히틀러는 바르바로사 작전에 17개 전차사단으로 구성된 4개 전차군(3,106)를 투입했다. 그라고 핀란드에는 2개의 독립전차대대 Pz.Abt. 40Pz.Abt. 211(124대 중 3호전차는 20대에 불과)를 배치했다. 25기갑사단은 19414월에 있었던 그리스침공 후에 독일에서 재편성한 후에 예비부대로 남겨두었다. 그 외에는 롬멜이 리비아에 가지고 있던 15전차사단과 프랑스의 2개 전차여단이 전부였고 더 이상 전차부대를 편성하지 않았다. 

결국 최고사령부는 바르바로사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전차부대를 투입했고 개전 후에 예상을 깨고 발생하는 막대한 손실을 제대로 보충하지도 못했다. 1941년 중반, 독일은 매월 평균 250대의 전차를 생산했는데 그 중에 절반은 3호전차였다. 1년 전의 프랑스와 벨기에 경험으로 6주의 단기전에서 30% 이상의 주력전차를 잃을 것으로 계산했고 히틀러도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3호 전차 E형입니다. 경전차를 상대로는 훌륭한 전차였지만 소련중전차에게는 화력, 방어력과 주력 모두 심각한 열세였습니다. 엔진출력이 부족해서 몸집을 키우거나 장포신으로 개장할 수도 없었습니다. F형부터 5cm 포를 장착한 것이 고작이었죠.

아래는 3호 전차의 생산량입니다. 개전 후에야 생산량이 급증했습니다.  

 

 

 

그리고 독일은 3호와 4호전차 말고는 신형전차를 개발하지 않고 있었다. 군병기국Heereswaffenamt은 바르바로사 작전 4주 전에서야 헨셀Henschel과 포르쉐Porsche에게 신형중전차개발을 맡겼는데 전장에서 소련의 T-34KV-1을 만나기 전까지는 중점을 두지도 않았다.

 

독일의 4개 전차군의 주요 목표는, 북쪽의 레닌그라드Leningrad, 중앙의 모스크바Moscow와 키에프Kiev 그리고 남쪽의 돈바스Donbass(우크라이나 산업지대)였다. 출발점에서 목표까지는 최소 800km에서 최대 1,200km의 엄청난 거리였다. 히틀러는 개전 후 10주면 목표까지 도착할 것으로 기대했는데 국경에서 적군을 궤멸시켰더라도 불가능한 진격속도였다.

보통 100km 도로주행 후에 약 5%의 전차가 기계고장으로 이탈했고 사소한 수리도 몇 시간은 걸렸다. 개전 3년 전,  2전차사단이 빈까지 도로 위를 670km 달린 후에 30% 가까운 전력이 이탈한 적이 있었다. 1940년 서부전역에서와 같은 손실을 입는다면 목표에 도착할 때에는 겨우 10~20%만이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말도 안되는 기동계획은 부실한 독일정보망에 원인이 있었다. 최고사령부정보부는 적군의 전력과 배치에 대해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독일감청부는 19407월의 소련 기계화군단 재편성에 대해 알아내지 못했고 적군 기갑부대가 여전히 독립 전차와 기계화여단으로 배치된 것으로 알았다.

 

19416월 초까지도 적군이 41개 기계화여단, 9,500대의 전차를 동원할 수 있을 것으로 계산했다. T-26, T-28, T-35BT-5/ 7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 참고자료를 배포했는데 193912월 핀란드에 투입되었던 60mm 장갑과 76.2mm 주포의 신형중전차(SMK)를 T-35C로 잘못 설명했다. 바르바로사 18개월 전에 이미 소련의 중전차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독일군이 보유한 대전차포로 격파할 수 있다고 믿었다

 

 

 

 

 

위가 핀란드전투에서 버려진 SMK, 아래가 T-35 다포탑전차입니다. 독일이 혼동할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