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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동부전선 기갑전에 대한 미신과 오해 (2부)

by uesgi2003 2015. 10. 31.

 

동부전선 기갑전에 대한 미신과 오해 (2부)

 

스탈린은 독일의 침공에 앞서, 가능하면 영토를 획득하되 적군이 확실한 준비를 갖출 때까지 본격적인 전쟁을 벌이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새로 편성되는 기계화군단 상당수를 서부국경에 배치해서 독일침공을 저지하고 나머지는 예비군으로 후방 깊숙한 곳에 남겨두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의 계획은 독일의 손에 놀아났다. 소련기갑지휘관은 채 준비도 안된 부대를 그것도 독일의 진격로 앞에 조금씩 밀어 넣었다. 그렇지 않아도 최정예 독일기갑군은 국경에 집결해 있었기 때문에 거리나 보급의 약점도 없었다.

 

독일 최고사령부도 소련의 전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1940년 프랑스군보다 훨씬 어려운 상대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전격전Blitzkrieg 교리의 핵심은 기갑전력을 집중시켜 짧고 강력한 한 방으로 적을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보통의 군대라면 공황상태에 몰려 항복을 하기 마련이지만 히틀러는 스탈린과 적군의 죽음을 원했기 때문에 항복은 아예 선택권 밖이었다.

히틀러는 전멸전을 선택했고 바이마르Wehrmacht(독일국방군)는 적군을 단 한번의 작전으로 패배시킬 수 없었다. 독일기갑군은 19399~19415월 기간 동안 영국해협을 빼고는 심각한 지형이나 기후를 만난 적이 없었다. 클라이스트Kleist 전차군은 험지라고 할 수 있는 아르덴느Ardennes숲은 순식간에 통과했고 뫼즈Meuse나 솜Somme강도 무사히 건넜다. 그렇지만 소련은 그런 험지가 끝없이 이어졌다. 

스탈린이나 적군은 항복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19414, 클라이스트 기갑군은 많은 강과 산악지대로 얽힌 유고슬라비아와 그리스를 3주도 안되어 점령했다. 겨울 기동작전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히틀러는 전차가 지형과 기후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자신했다.

반대로 적군은 1939~1940 핀란드 겨울전쟁(사진 참조)에서 기계화부대가 숲지형과 겨울기후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교훈을 얻었고 기계화부대 재편성에 적용하고 있었다. 소련 군사작전에서는 크고 작은 강의 도강이 당연했기 때문에 전차의 도강능력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독일과 소련 모두 Pz.IIIPz.IV 잠수전차TauchpanzerT-37, T-38, T-40 경수륙양용전차를 소수 보유했지만 나머지 전차는 가슴 높이의 물은 그냥 건널 수 없었다. 1941~1942년 당시의 독일기갑사단의 도강능력은 원시적이었는데 12시간 정도 걸려 50m 길이의 부교를 놓아도 3호전차만 건너갈 수 있었고 4호전차는 다리를 제대로 놓아야 건널 수 있었다.

 

 

 

3호와 4호전차는 약 3톤 정도의 차이 밖에 안났는데도 부교는 3호전차 정도만 지나갔던 모양입니다.

 

 

 

 

독일공병은 연합군의 능력에 비해 크게 뒤져 있었고 영국의 장간 조립교Bailey bridge(사진 참조)가 없었다. 1941년 소련전차사단은 부교대대를 자체적으로 보유할 계획었지만 대부분 제대로 편성도 안되었고 그나마도 대공황상태로 후퇴하던 중에 모두 사라졌다.

 

전차가 얕은 개울은 건널 수 있다고 해도 이런 곳은 대전차포나 지뢰로 충분히 봉쇄할 수 있었다. 드네프르Dnieper나 볼가Volga와 같이 매우 넓은 강은 군 차원의 공병이 투입되어야 했다. 특수보트(사진 참조)로 전차를 반대편으로 실어 나른다고 해도 적의 반격으로부터 교두보를 방어하는 정도 밖에 안되었다. 그래서 다리, 특히 전차무게를 견딜 수 있는 철교를 두고 양쪽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다리나 여울목이 마땅치 않은 경우, 기갑작전은 완전히 중지되었다. 동부전선은 습지나 울창한숲에 막힌 지형이 많아서 기갑부대는 수시로 멈추거나 좁은 외길을 줄지어 가야만 했다. 북부의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오스타시코프Ostashkov(사진 참조) 사이의 습지대와 프리페트Pripet 습지(아래 사진 참조)는 기갑작전이 어려울 정도였다.

조금만 잘못하면 전차가 주저 앉았고 좁은 길을 따라 가는 길목은 대전차포 기습을 받았다. 적군은 어이없게도 1941년 국경전투 초반, 프리페트 습지에서 귀중한 T-34KV-1을 많이 잃었다. 동부전선에서 기갑전을 벌일 최적지는 우크라이나 스텝지역이었는데 그나마도 우기에는 최악의 진흙탕으로 변했다.

 

 

 

소련은 도시지역과 돈Don강 계곡 등에도 전차 트랙이 벗겨지는 험난한 지형이 많았다. 소련은 4계절 모두 사용할 수 있는 튼튼한 도로가 거의 없다시피 했고 독일군 차량의 기동성은 크게 떨어졌다. 여름에는 뜨거운 열기에 놀라고 봄과 가을에는 진흙에 발목이 붙잡히고 겨울에는 동상에 걸렸다. 특히 전차병에게 진흙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는데 서방 역사기록에서는 가을과 봄의 진흙장군Rasputitsa 정도로 지나치게 단순화시켜왔다.

 

동부전선은 레닌그라드에서 크림Crimea반도까지 1,700km 길이였고 지역마다 기후가 달라졌다. 보통 비가 오면 4~500km 범위였지만 다른 지역은 비나 눈이 일체 내리지 않았다. 기후변화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몰려들었고 독일군이 악천후를 먼저 겪어야 했다. 

그리고 6~7월에 강수량이 가장 많고 4~5월에는 건기였다. 1941, 남부군집단Heeresgruppe Süd (또는 집단군)7월 강수량이 9~10월보다 2배나 많아서 여름에도 심각한 기동문제를 겪었다. 진흙이 생기면 기갑부대의 차량과 야포는 거의 움직이지 못했고 궤도차량도 결국에는 로드휠이 진흙에 미끄러지며 묻혀버렸다. 보급트럭이 진흙을 뚫지 못하면 보병용 하프트럭을 전장에서 빼내 보급차량으로 전용하거나 트럭을 견인했다.

진흙이 두터워지고 끈적거리면 트랙 유지보수 작업은 그만큼 어려워졌다. 소련 전차병도 진흙에 대해 불만을 터트릴 정도로 큰 영향을 받았다. 1941년 당시 소련의 주력전차였던 T-26BT-7의 궤도는 독일 3호전차보다 훨씬 좁았기 때문에 독일군보다도 진흙탕을 더 싫어했다. 1941~42년 소련전차여단은 다양한 차량을 보유했는데 우수한 T-34도 우기에는 경전차와 비슷한 속도로 움직였다.

 

194110월에 첫 눈이 왔지만 대부분 지역은 5cm에 불과했고 24시간 후에는 비로 바뀌었다. 10월에 2~3차례 눈이 더 왔고 레닌그라드보다 습기가 많은 우크라이나에 더 많이 왔다. 11월 강설량은 20cm로 크게 뛰었지만 본격적인 눈은 12~2월에 집중되었다.

독일 장비는 온난기후에 맞춰 설계되었고 러시아의 추운 기후에 맞지 않았다. 독일전차 궤도는 말그대로 땅에 달라붙었고 배터리는 용액이 얼어서 터져버렸다. 체코제 Pz. 35(t)는 수냉식이어서 194110월 이후에는 아예 움직이지 못했다. 독일이 기대했던 단기전 승리가 물건너가면서 전차는 모든 면에서 미흡한 상태에서 겨울을 보내야했다.

 

2차대전 직전까지 전차교리는 보병을 지원해야 한다는 지원부대와 독립부대 둘로 나위어져 있었는데 독일과 소련 모두 독립 기갑부대 교리가 우세했다. 독립부대 옹호론자는 기갑부대로 적진을 돌파하고 장거리 기동전으로 섬멸전의 선봉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을 내세웠다. 그렇지만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주장이었고 독일과 소련 모두에서 기병지휘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전통적인 기병의 역할을 전차에게 내주기 때문이었다. 보병과 기병장교는 독립기갑부대 편제를 반대했고 그 역할에 대해서도 제한을 두려고 했다.

 

보병장교는 중장갑과 곡사포를 갖추고 보병을 지원하는 전차개발을 주장했기 때문에 속도나 작전거리는 중요하지 않았다. 기병장교는 기병대가 전차를 보유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찰과 추적용으로 기병과 함께 움직일 경전차를 원했다.

3가지 주장이 힘을 겨루면서 1920~1930년대에는 다양한 전차가 개발되었고 점차 보병지원과 기병추적 요구사항을 모두 아우르는 효과적인 전차를 모색했다. 모든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범용전차 개발이 불가능해지자 목적에 따라 몇 가지 전차를 개발하기로 했다.

보병지원전차는 참호, 벙커, 건물에 틀어박힌 보병을 처리할 무기로 무장했다. 보병에 앞서 적의 화력을 막아내야 하기 때문에 중장갑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기병임무전차는 속도와 기동성이 가장 중요했다.

 

독일과 소련 모두 이런 교리에 따라 최상의 조합을 했고 1941~45년 전쟁에서 결과가 드러났다. 독일은 1차대전 후 베르사이유Versailles 조약에 따라 전차를 제조하거나 보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적군과 비밀협약을 맺고 1929년 카잔Kazan(아래 지도와 사진 참조) 전차교육학교를 세웠다. 적군은 1차대전 당시의 유물전차가 고작이었기 때문에 외국의 전차기술에 혈안이 되었고 교전국이었던 독일과도 기꺼이 협력했다.

4년 동안 독일은 카잔학교에서 2가지 유형의 전차를 시험했고 효과적인 지휘를 위해 모든 전차에 무전기를 장착하기로 결정했다. 독일관측통은 영국의 훈련에서도 무전기의 효용성을 다시 확인했다.

 

 

 

 

소련과 독일 모두 서유럽국에 들키지 않으려고 참 멀리도 전차학교를 만들었습니다. 실제 전차를 보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토바이, 자동차, 트랙터 등을 이용해 가상훈련을 했습니다.

위대한 게르만전차의 전설은 이런 황당한 상황에서 시작했습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 발터 모델Walter Model과 발터 네링Nehring은 소련에서 지내면서 소련전차훈련을 직접 확인했다. 적군은 카잔학교를 지원하는 조건으로 라인메탈Rheinmetall에서 3.7cm 대전차포와 7.5cm 대공포를 구입해 자국의 전차무장에 활용했다.

그리고 독일의 연료분사 기술을 하리코프 자동차공장의 디젤엔진 개발에 적용했다. 그렇지만 독일이 기술을 제대로 전수하지 않는다고 불신하고 19339월에 카잔학교를 폐쇄했다.

 

미하일 투카쳅스키Mikhail Tukhachevsky, 블라디미르 트리안다필롭Vladimir K. Triandafillov과 게오르기 이세르손Georgy Isserson 등의 소련 군사이론가는 종심전투Deep Battle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맑스와 레닌주의의 지연전과 통합했다.

적군은 전차개발에는 전적으로 동의했지만 보병지원파와 기병파 중에 하나를 선택하지 않았다. 대신에 192910월에 발표한 야전규칙 PU-29으로 전차교리를 정리했다. PP전차는 보병을 지원하고 DD전차는 적의 배후로 돌아 포병을 궤멸시킨다고 명시했다. 세묜 부됸니Semyon Budyonny원수와 같은 기병파는 기병-전차 합동의 종심전투를 고집했다.

적군은 기계화와 자동화국Office of Mechanization and Motorization, UMM을 만들어 PU-29 교리를 실행에 옮겼다. UMM 국장은 요새화된 지역을 돌파하려면 중전차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76.2mm 곡사포와 37mm 직사포를 무장한 60톤 전차를 주장했다. 이렇게 되면서 소련공장은 경(가운데), (무거운)전차를 동시에 개발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5개년 계획(1928– 32) 초기만 해도, 소련산업은 제대로 된 전차엔진이나 전차포를 설계하지 못했고 매년 소량의 경전차만 간신히 만들어냈다. 스탈린과 정치국은 국내경제상황보다 서방의 전차개발에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원래 필요했던 것보다 2배의 전차를 생산하라고 명령하고 기술개발을 재촉했다.

레닌그라드에 OKMOSKB-2, 하리코프에 KhPZ라는 3개의 전차설계국이 만들어졌다. 고르키 Gorky의 포설계국도 신형전차 무장에 투입되었다. 스탈린의 재촉에 따라 UMM은 다양한 전차프로젝트를 주도했고 많이도 실패했지만 소련전차산업은 급성장할 수 있었다.

 

5개년 계획목표와 숙청에 쫓긴 소련전차국은 최대한 많이 만들 수 있는 전차를 개발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에는 전쟁에 큰 도움이 되었다. 스탈린은 무자비한 압박으로 소련의 국방산업을 놀라울 정도로 일으켰고 5개년 계획기간 동안 5,000대의 경전차를 생산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