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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2차대전

동부전선 기갑전에 대한 미신과 오해 (3부)

by uesgi2003 2015. 11. 3.

 

국정교과서 망발에 대해 당연한 반대여론으로 급격하게 기울자, 청기와집, 뉴라이트 꼴통, 교과부 앞잡이들이 몹시 당황하고 있다는 후문입니다. 어제까지 여론수렴 기간이었다고 하는데, 그냥 형식일 뿐 실제로 여론을 수렴할 생각은 0.1g도 없죠.

이제는 적화통일 교육, 북한의 지령까지 나왔는데... 여전히 어느 교과서인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죠.

 

어제 오늘 아베를 만났다고 하는데, 천생연분인데도 속마음은 서로를 비웃고 있었을 겁니다. 

 

 

 

동부전선 기갑전에 대한 미신과 오해 (3부)

 

젊은 소련 공학자들은 기성부품 사용에 금방 적응했고 영국과 미국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설계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존 월터 크리스티의 혁신적인 M1931 전차원형(사진 참조)의 경사장갑을 BT 경전차 시리즈에 적용했다.

소련 간첩은 영국의 전차설계도 빼내는데 성공했다. 전차불모지였던 소련은 겨우 2년 만에 T-26BT 경전차 시리즈를 연이어 생산해냈다. 처음에는 외국의 엔진과 무장을 사용하다가 레닌그라드, 하리코프와 고르키 설계국에서 엔진과 전차포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특히 콘스탄틴 첼판Konstantin F. Chelpan은 실용성 높은 디젤엔진 개발(V-2 엔진, 사진 참조)을 성공시켜 2차대전 동부전선 기갑전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적군은 5개년 계획 덕분에 1932년에는 충분한 전차를 보유하게 되었고 독립전차여단과 보병지원여단을 모두 편성할 수 있었다. 독일이 첫 번째 전차사단을 배치하기 3년 전에 이미 2개 기계화군단을 편성했고 3일 만에 250km 후방까지 종심전투를 벌일 전력을 갖췄다.

보병과 기병을 지원할 T-35 중전차의 중전차여단과 독립기계화여단도 편성했다. 1932~33, 적군은 새 전차부대로 종심전투 개념을 테스트하기 시작했다. 1934, 알렉산드르 세디아킨Aleksandr I. Sediakin은 종심전투 지침서를 만들어서 전차, 기계화보병, 포병과 공군의 합동작전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세디아킨과 참모는 종심전투 교리를 실제로 시험한 후에 후방에 침투한 전차부대에 대한 보급문제를 알아냈다.

 

모스크바의 기계화와 자동화 사관학교Military Academy of Mechanization and Motorization (VAMM)가 새 교리에 따라 대대와 연대장 훈련을 시작했지만 세디아킨의 지침서도 맑스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다. 하급장교는 전장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지시 받은 내용만 그대로 수행하도록 교육받았다.

소련의 전차광풍과 반대로, 독일은 베르사이유 조약에 따라 1934년 이후에 전차개발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히틀러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다고 해도 전차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늦었고 루드빅 베크Ludwig Beck를 비롯한 고위장성은 전차부대 편제를 반대했고 당시 대령에 불과했던 하인츠 구데리안Heinz Guderian 정도가 독립기갑군 편성에 찬성했다.

 

 

 

독일전차전의 아버지 구데리안입니다. 모스크바 전투에서 히틀러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 초반에 경질되었고 그 덕분에 종전 후까지 살아남아 2차대전의 귀중한 증언을 남겼습니다.

  

히틀러가 19356월에 독일국방군을 재편하면서 36개 사단으로 증편할 때에, 구데리안 등의 주장으로 3개 전차사단 편제를 승인받았다. 통신장교 출신으로 지휘경험이 없었던 구데리안이 제2 전차사단 지휘관이 되었지만 베크와 만슈타인은 독립전차사단에 대응해 보병을 지원할 돌격포sturmartillerie부대 편제를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독일기갑전력은 독립전차와 돌격포부대 말고도 전차엽병panzerjäger의 구축전차로 분산되었다. 히틀러는 국내경제회복에 더 많은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스탈린과 달리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도 재무장을 원했지만 독일국민에게 많은 부담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군수공장은 정상근무를 했고 생산량도 늘지 않았다. 히틀러는 놀랍게도 소련침공 전까지 전차생산을 독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다음 해에도 가동률을 높이지 않았다.

결국 소련은 신형전차를 마구 찍어내는 동안 독일은 상당한 여유를 부렸다. 소련에서는 생산비용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독일은 여전히 대공황에서 회복 중이었기 때문에 비용에 민감했기 때문에 중전차와 같이 큰 비용이 들어가는 무기는 뒤로 미뤄졌다.

 

1920년대 말에 채택한 기갑전 교리에 따라 충분한 화력과 기동성을 갖춘 전차가 필요했지만 1호와 2호 경전차를 주로 사용할 수 밖에 없었고 체코의 Pz. 35(t)Pz. 38(t)가 귀중한 자원이었다.

독일국방군은 신형 중전차에 대한 기술요구사항도 제대로 제시하지 않아서 결국 3호와 4호 전차만으로 전쟁을 시작했다. 3호 전차는 3.7cm 포로 구축전차 역할을 하며 전차사단의 주력이 되었고 4호 전차는 7.5cm 저속포로 보병을 지원하기로 했다.

소련은 2년 만에 원형에서 대량생산 체제로 넘어간 반면에, 독일의 3호와 5호 전차 프로그램은 5년이나 걸렸고 그나마도 8개 회사가 관여하고 업그레이드 모델을 계속 내놓았기 때문에 대량생산할 수도 없었다.

 

 

개전초기 화력이 부족한 독일군에게 귀중한 전력이 되었던 체코제 전차입니다. T는 체코를 의미하는 약자인데 톤으로 오해하기도 합니다. 실제 중량은 10톤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소련침공을 시작했는데도 3호와 4호 전차 생산량은 기존의 전차사단 편제는 고사하고 손실보충에도 부족했다. 이렇게 해서 독일전차는 소련전차에 비해 늘 숫자가 부족했고 지휘관도 전차를 투입하는데 아무래도 미온적이었다.

3호와 4호 전차는 매우 보수적인 설계였고 혁신적인 면이 많지 않았다. 3호 전차의 주무장은 기존의 3.7cm 포였다가 19408월에 단포신 5cm KwK 38L/42로 바뀌었는데 히틀러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그 판단은 옳았다. 그는 장포신 5cm 포 개발을 지시했지만 병기국은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다.

3/4호 전차는 300hp 마이바흐Maybach HL120TR 엔진을 사용했는데 낮은 출력 때문에 19~22톤에 맞는 장갑과 무장을 갖추게 되었다. 가솔린 엔진이다보니 연비도 나빴고 2차대전 내내 문제가 되었다.

 

히틀러가 디젤엔진 개발에 관심을 보였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어려운 시도라는 반응에 힘을 잃었다. 바르바로사 개전 당시의 독일전차 설계를 한 단어로 설명한다면 '평범'이었다. 더구나 1941년 이후에는 장갑과 무장을 늘리면서 기동성은 더욱 떨어졌다.

실제로 2차대전 전체 기간 동안 독일은 장거리 기동작전에 적합한 전차를 개발하지 못했다. 장교 대부분은 매복해서 파괴할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대전차포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고속 3.7cm 대전차포는 500m 거리에서 3~40mm 장갑을 관통할 수 있었고 대부분의 중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작은 대전차포는 교전에서 첫 발을 먼저 발사할 수 있기 때문에 전장에서 매우 유리하게 느껴졌다. 3호 전차는 적진을 돌파하면서 적의 대전차포를 상대하기 때문에 고속 철갑탄의 중요성도 떨어졌다.

 

전차전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많은 피해를 입기 때문에 전쟁 초반에는 전면충돌을 피하려고 했다. 1940512~14일 벨기에 아뮤Hannut전투에서 34전차사단은 프랑스전차와의 교전에서 3일 만에 25%를 잃었다. (프랑스군은 121대를 잃은 반면에 독일군은 160대를 잃었는데 나중에 대부분 회수해서 수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49대만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40~41년 독일의 제한된 생산량 때문에 독일군은 소모전을 피할 수 밖에 없었고 전차파괴는 전차엽병부대가 맡고 전차부대는 교리대로 적진돌파와 확대임무를 맡았다. 이런 특수임무를 위해 전투단kampfgruppen전술이 개발되었고 약간의 전차, 기계화 보병, 공병, 자주포, 전차엽병, 대공포와 통신병이 연합해 하나의 부대로 작전을 수행했다.

독일교리는 전차를 전투승수combat multiplier의 무기체계로만 생각하고 그 이상의 역할은 루프트바페의 근접지원에 맡겼다.

 

 

아뮤전투에서 버려진 소뮤아 전차를 독일군이 조사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소련 전차병은 스페인 참전경험으로 전차전이 불가피하다고 믿었고 전차전에서 우세한 전차를 처음부터 원했다. 1936~37년 스페인내전Spanish Civil War에서 전차여단을 지휘했던 드미트리 파블롭Dmitri Pavlov장군(사진 참조)은 참전경험을 바탕으로 소련전차교리와 전차개발에 참여했다.

그는 전차전에서 우위를 점하려면 화력과 방어력이 더 좋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련정보부는 독일이 5cm 대전차포를 개발하고 있고 가까운 미래에 고속 7.5cm 전차포도 배치한다는 정보를 빼냈다.

 

 

 

 

스페인 내전에 투입된 소련제 T-26전차입니다. 

 

파블롭은 철갑탄과 고폭탄을 쏠 수 있는 다목적 중구경 포를 개발하자고 주장했다. 레닌그라드 키롭공장은 76.2mm L-11 전차포를 개발해 1938년부터 시험했고 고르키의 포설계국도 1939년 말에 76.2mm F-32 포를 시험하기 시작했다.

파블롭은 둘 중에 우수한 것을 차세대 전차에 장착하려고 했고 독일의 3.7cm Pak때문에 T-26BT 시리즈가 무용지물이 될 것으로 보고 5cm 대전차포탄을 견딜 수 있는 방탄 중전차 개발을 재촉했다.

그는 체플란의 500마력 V-2 디젤엔진개발도 지원해서 19384월부터 시운전을 시작했다. 개발 중인 신형 T-34KV-1 중전차도 경사장갑, 신형 V-2 디젤엔진과 L-11 포를 장착해서 독일의 신형 3호 전차보다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했다.

 

 

75년 후에도 북한군이 유령포탄(?)을 날려서 국민을 놀라게 만든 76.2mm 다목적 포입니다. 혹시나 싶어서 다시 설명하면, 유엔정전위는 북한의 포격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76.2mm 덕분에 공수주 3박자를 갖추게 된 T-34입니다.  

 

KV-1의 설계가 이미 상당부분 진척되어 경사장갑을 적용할 수 없었지만 T-34는 최신기술을 최대한 적용했다. 적군은 1940~41년 겨울 동안 혁신적인 기능의 신형 전차로 무장한 반면에 독일국방군은 구형 설계의 전차를, 그것도 너무 부족한 수량만 보급받았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최고사령부는 소련이 우수한 전차를 생산하지 못한다고 오판했기 때문이다. 1929~1933년 기술교류 당시의 원시적인 소련전차 이미지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고 15개년 계획에서 엄청나게 발전한 전차생산 능력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독일군정보부Abwehr는 소련에 대해 거의 장님에 가까웠고 소련전차의 양과 질 모두를 폄하했다. 소련궤멸에 광분했던 히틀러는 슬라브 민족과 공산주의를 원래 혐오했기 때문에 정보부의 엉터리 정보를 그대로 수용했다.

 

소련은 교리와 기술 모두에서 상당히 앞섰지만, 스탈린이 1937~41년 대숙청을 벌이고 종심전투교리를 포기하면서 우위를 대폭 반감시켰다. 기계화와 독립전차부대는 공산당과 군을 분리시키려는 음모라고 착각했고, 새로 편성된 기계화부대와 전차설계국을 특히 심하게 숙청했다.

11기계화군단장 카시안 차이콥스키Kassian A. Tchaikovsky가 첫 번째 체포대상에 있었고 수감 중에 죽었다. 투카쳅스키Tukhachevsky원수는 19376월에 처형당했고 다음 해 7월에는 세댜킨Sedyakin과 칼렙스키Khalepsky가 처형되었다. 첫 번째 숙청을 피했던 그레고리 이세르손Gregory Isserson1941년에 체포되어 노동수용소에서 2차대전을 보냈다.

 

 

러시아 최고의 지휘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투카쳅스키입니다. 폴란드 침공 시의 패전으로 스탈린과 반목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숙청당했습니다.

독일의 공작에 스탈린이 속아서 숙청되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투카쳅스키가 그대로 존재하고 스탈린이 대숙청을 벌이지 않았다면 동부전선의 판도는 초기부터 완전히 달랐을 것입니다.  

 

내무인민위원회NKVD는 전차설계 공학자도 숙청하기 시작했다. V-2 디젤엔진 개발자 체플란은 19383월에 처형되었고 다른 설계국장도 그 뒤를 따랐다. 숙청은 4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바르바로사 개전 후에도 멈추지 않았고 파블롭도 숙청대상자가 되었다.

미하일 투카쳅스키Tukhachevsky와 고위전차지휘관이 거의 모두 사라지면서 종심전투교리도 기피대상이 되었다. 스탈린은 193911월에 기계화군단 해체를 명령했고 적군의 전차부대는 결정타를 맞고 몇 년 동안 회복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독일이 19406월에 프랑스를 상대로 눈부신 승리를 거두자, 스탈린은 19407월에 8개 기계화군단 재편성을 결정했다. 갑작스런 반전은 오히려 조직과 훈련에 대혼란을 가져왔고 새로 편성된 기계화군단은 1941년 여름까지도 대규모 기동훈련에 참여하지 못했다.

 

더구나 종심전투교리가 계속 외면받았기 때문에 기계화군단의 전략전술도 혼란스러웠다. 반대로 대부분의 독일전차병은 폴란드, 프랑스와 발칸전투에서 귀중한 실전경험을 쌓았고 완성된 기동전투교리에 따라 소련국경을 넘었다.

폴란드 침공 당시에 독일군 최대 기갑전력은 1개 전차사단과 2개 기계화보병사단으로 구성된 2개 군단이 전부였다가 프랑스 침공에서는 전차사단 5개와 기계화보병사단 3개의 클라이스트 전차군을 투입했다.

19416월이 되자, 독일군집단은 최소한 1개 전차군을 보유하게 되었고 전차사단은 적진돌파보다는 협공 후 포위섬멸하는 주공으로 사용되었다.

소련연합부대는 19398월 노몬한Nomonhan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한 것이 전부였는데 그나마도 실전을 경험한 전차부대는 소규모에 불과했다. 바르바로사 개전 당시, 독일국방군은 참전경험과 교리 면에서 적군에게 훨씬 앞섰고 독일전차가 가지는 기술한계를 극복하기에 충분했다.

 

 

 

 

노몬한전투는 칼킨 골Khalkin Gol전투라고도 부릅니다. 이 전투에서 충격을 받은 일본군은 전차생산량을 대폭 늘리고 대전차포를 개량했지만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습니다. 

 

투카쳅스키 숙청과 관련된 동영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