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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독립전쟁

미국 전투교본의 탄생, 쎄로 고르도 전투

by uesgi2003 2011. 10. 5.

이것으로 멕시코와 미국의 분쟁은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간단하게 배경 설명을 하면 알라모 전투로 독립을 하게 된 텍사스가 미국과 합병하게 되자 멕시코는 강한 반발을 하게 됩니다. 미국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북미 전체로 노골적인 확장을 하게 되면서 멕시코와 본격적인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독일이 폴란드 국경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니 미국이 베트남 해안에서 유도했던 통킹 만 사건처럼 일부러 국경에서 분쟁을 유도한 후에 멕시코 군의 공격을 빌미로 압도적인 병력을 이끌고 멕시코를 유린합니다.

 

쎄로 고르도 전투가 미국에게 의미있었던 것은, 기존의 전투는 잘 훈련된 병사를 대거 투입해 정면충돌한 후에 한쪽이 무너질 때까지 전투를 벌이는, 이겨도 이긴 것이 아닌 전통방식에서 벗어나 작전에 따라 정찰하고 적이 기다리는 곳을 피해 허점으로 우회기동하고 협공하는 현대 전술의 교본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향후 미국 남북전쟁 등의 기라성같은 지휘관들이 대거 배출됩니다.

 

멕시코 전쟁에서 미군이 동원한 총병력은 70,000명이며 많다면 많을 수도 있는 병력입니다만, 당시 멕시코도 창칼로 무장한 원주민이 아니고 유럽의 영향을 받아 상당한 무장을 갖추고 있었고 전체 인구가 7,000,000명이어서 본토로 들어오는 미군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항상 강조하는 '민족과 국가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민족과 국가를 전쟁에 동원하는' 독재자때문에 '왜 싸워야 하는 지'를 몰랐고 수도까지 내주게 됩니다.

 

미국 전투교본의 탄생, 쎄로 고르도 전투

 

윈필드 스코트(Winfield Scott)는 철저한 정찰과 우회기동으로 멕시코 시티로 향하는 길을 열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미국의 전투교본을 만들었다.

 

Thomas Flemming (Military History 특별판)

 

1847 3 5, 70척의 미국 함대가 베라끄루쓰(Veracruz) 시에 접근하자 갑판에서는 환호성을 올랐다. 함대에 탄 12,250명의 병사는 항구를 방어하는 산 후안 데 울루아(San Juan de Ulua) 요새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들은 항구에 상륙하게 되면 멕시코를 처음으로 정복했던 에르난도 꼬르떼쓰(Hernando Cortez)의 경로를 그대로 따른 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전투가 미국의 향후 전투의 교본이 된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림 설명: 미군이 횡렬로 멕시코 군이 있는 쎄로 고르도로 진격하고 있습니다. 우회기동과 포격으로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입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원정대의 지휘관 윈필드 스코트 소장은 메사츄세츠 증기선에 타고 있었다. 부하들 사이에서는 "요란법석 장군(Old fuss and feathers)으로 알려진 그는 뭔가 그럴 듯하게 보이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군복을 상당히 좋아했는데 완전군장을 갖추고 사열하는 것을 즐겼다. 이제는 사열대를 떠나 무늬만 군복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때가 온 것이다.

 

그림 설명: 군복과 대열 등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지휘관은 고지식하기 마련인데, 스코트는 꼼꼼하면서도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유능한 지휘관이었습니다.

 

스코트는 멕시코 연안을 봉쇄하기로 한 함대 사령관인 코모도어 데이빗 코너의 조언을 구한 후에 상륙지점을 선택했다. 시점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황열병이 번지기 전에 베라끄루쓰를 신속하게 점령해야만 했다. 황열병이 발생하면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전력에 극심한 타격이 될 것이다.

3 9, 수송선에서 상륙선으로 옮겨 탄 보병들이 산 후안 요새의 중포를 피해 베라끄루쓰 남쪽 3.5km 지점의 섬 근처로 진입했다. 허풍치기를 좋아하는 윌리엄 워쓰(William Worth) 소장이 5,500명의 상륙부대를 이끌고 상륙선에 탔다. 이 배는 양 옆이 높고 안은 넓어서 50명의 병사를 수용할 수 있는 초기의 상륙선이었다.

워쓰 중장이 탄 배가 가장 선두에 서서 오후 6시에 멕시코 해안으로 향했다. 뒤에 남은 함대에서는 "Yankee Doodle", "Hail Columbia", "Star Spangled Banner"와 같은 음악을 연주해서 사기를 북돋우었다. 전함은 해안에 멕시코 군이 나타나면 바로 포격을 가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산 후안 요새의 포가 두 발을 발사했지만 근처도 오지 못하고 떨어졌다. 상륙선이 땅에 오르자 워스 장군이 칼을 뽑아 들고 가장 먼저 발을 디뎠다. 나머지 병사들도 재빨리 상륙해 중대 단위로 대열을 정비했는데, 멕시코 군의 반응은 전혀 없었다. 물론 스코트가 지적 노력이라고 불렀던 치밀한 사전 구상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뒤를 따라 데이빗 트윅스(David Twiggs) 준장이 이끄는 사단이, 그리고 그 다음에는 로버트 페터슨(Robert Paterson) 소장의 제3 사단이 상륙했다. 10시가 되자 12,000명이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무사히 상륙했다.

 

미군은 베라끄루쓰로 바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이 단계에서도 사전 구상이 주효했다. 스코트는 지원병으로 구성된 패터슨의 사단을 먼저 보내 모래 밭 사이로 길을 내게 했다. 지원병들이 고생해서 몇 km의 길을 뚫자, 트윅스의 사단이 길을 따라 전진해 참호를 파고 대포를 설치하며 도시에 포위망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동안 미군은 베라끄루쓰의 물 공급을 끊었다. 이 모든 작업이 2주가 걸렸다.

 

스코트는 이제 멕시코 사령관인 후안 모랄레스(Juan Morales) 소장을 불러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멕시코 사령관은 스코트가 황열병을 염려해 곧 전면공격을 시도하기를 바라며 항복하지 않았다. 그는 한 후안 요새와 베라끄루쓰의 여러 요충지에 4,000명의 병력을 배치해 놓고 있었다. 미군에게 패배하더라도 최대한 피해를 줄 생각이었다.

 

워쓰는 전면공격을 주장했지만 스코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7개월 전에도 워쓰는 몬터레이(Monterrey)의 멕시코 도시를 전면공격했다가 20%에 해당하는 488명이 죽거나 다쳤던 적이 있었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는데도 3일 만에 도시를 점령하느라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이었다. 워쓰는 그런 사실을 숨기고 스코트에게 바로 공격할 것을 요구했다.

워쓰와 일부 장군은 전투에서 많은 병사가 죽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스코트가 그의 사단을 사령부가 있는 꼬야도(Collado) 해변에 배치시킨 이유가 다 있었다. 그는 워쓰가 명령을 무시하고 무분별한 전면공격을 시도할까 염려되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1812년 전쟁에서도 함께 복무했었기 때문에 스코트는 워쓰의 과욕을 잘 알고 있었다.

전면공격을 주장하는 워쓰에게 편지를 보내, 베라끄루쓰를 신속하게 점령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지만, 무력보다는 작전수립이 먼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스코트는 밤에 공격할 수 밖에 없고 그러면 멕시코 군인뿐만 아니라 시민들까지 피해를 입는다고 말했다. 그는 "렇게 학살을 해봐야... 시민의 저항을 산다"고 썼다. 그리고 귀중한 2,000명의 부하가 죽을 수 있다고 했다. 지금의 병력도 대통령이 약속했던 것의 절반 밖에 안되는 수준인데, 이렇게 피해를 입으면 "그 다음 전투는 어떻게 할 수 있겠소?"라고 마무리지었다.

60세의 스코트는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어떤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지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베라끄루쓰 북쪽 350km의 로보스 섬에서 출발할 때에도 군복을 완전히 차려 입고 메사츄세츠의 선수에 서서 정규군과 지원병의 환호성을 이끌어냈었다. 베라끄루쓰 포위망 준비를 검사하는 동안에도 일부 병사가 방벽에 상체를 드러내고 자신을 구경하자 "참호 밖에 나오지 마!"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장군님. 장군님도 노출되었는데요"라고 한 병사가 소리쳤다.

"! 장군할 사람은 많아. 하지만 병사는 아무나 할 수가 없어"라고 대답했다.

 

3 23, 스코트는 수륙 양면으로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해군과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그는 함대의 중포를 가져와 화력을 높였다. 땅에 설치한 함포는 15kg 30kg 무게의 포탄을 도시의 벽과 지붕에 퍼부어 남쪽 벽이 40m 정도 무너져내렸다. 박격포에서 발사된 고폭탄은 시민과 병사를 모두 공황상태에 빠뜨렸다. 멕시코의 포대도 응사를 했지만 미군이 미리 모래주머니로 잘 보호한 미군의 포대에 거의 피해를 주지 못했다.

 

그림 설명: 베라끄루쓰를 공격 중인 미군입니다. 베라끄루쓰는 전략요충지로 외세의 침공이 있을 때마다 가장 먼저 공격당하는 요새이자 도시였습니다.

 

3일 동안 포격을 받은 모랄레스 장군은 항복 깃발을 게양하면서 베라끄루쓰가 항복했다. 미군은 단 한 명도 잃지 않았고 부상병도 겨우 67명 뿐이었다. 해군은 단 한 발만 피격되어 4명의 선원이 죽었을 뿐으로 "멕시코의 지브랄타"라는 요새도시를 점령한 댓가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낮은 피해였다.

멕시코 군보다도 황열병이 두려웠기 때문에, 스코트는 내륙으로 바로 부대를 진입시켰다. 그는 베라끄루쓰 정리를 워쓰에게 맡겼다. 스코트는 멕시코 시민을 달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는 일요일에 성당에 나갔고 미군은 음식, 당나귀와 말에 대해 정당한 값을 지불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리고 "미군은 여러분의 적이 아니며, 여러분을 괴롭히고 전쟁을 불러온 독재자가 적입니다"라고 발표했다.

이것도 사전에 준비된 작전이었다. 겨우 12,000명의 병사, 그것도 20%를 베라끄루쓰에 남겨두어야 했기 때문에 미국이 정복자로 각인되면 7,000,000명의 멕시코 인들을 감당할 수 없었다. 화해는 스코트가 멕시코 전쟁의 한 작전으로 대통령과 사전에 교감을 나누었던 아이디어였다. 스코트는 민주당의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과 평생을 라이벌 관계로 지내면서, 휘그당(현재의 공화당, Whig)의 이념을 따르게 되었다. 공화당에 얼마나 심취했던지 1844년에는 공화당 대통령후보인 헨리 클레이(Henry Clay)를 공식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전쟁 초기에는 민주당 출신의 대통령 포크가 그를 일부러 무시하면서 자체어리 테일러(Zachary Talyor) 소장이 지휘를 하게 했었다.

테일러는 세 번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북부 멕시코에서 적을 몰아냈지만 멕시코 정부는 포크 대통령의 협상요청을 완강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결국 공화당과 민주당 내부의 정치공세에 시달린 대통령이 스코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멕시코 시티를 점령해 무력으로 평화를 이끌어낼 것을 요구하게 된 것이었다.

스코트는 대통령의 말을 원래 믿지 않았지만 (앞의 멕시코 군과 뒤의 정적 사이에서 협살당하는 것에 대해 여러 번 불평했다), 충분한 검토를 거쳐 임무를 받아들였다. 그의 가장 먼저 최고의 참모를 모집했는데,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웨스트 포인트 출신으로 나중에 명성을 높인 사람들이었다. 로버트 리(Robert Lee, 남군 총지휘관) 대위, 조세프 존스톤(Joseph Jonston, 남군의 고위장성) 중위 등이 참모로 참여했다.

 

스코트는 1814년 치페와(Chippewa) 전투(독립이후 벌어진 영국과의 전투에서 영국 군에게 승리한 전투)에서 명성을 얻었다. 이 전투에서 그는 뛰어난 작전수립으로 미군을 패전에서 구했었다. 독립전쟁에서 미군은 숫자만 우세한 시민군으로 영국 군을 압박했고, 영국 정규군은 너무나도 쉽게 이들을 물리쳤다.

1814 7 5, 캐나다 치페와 강 근처에서는 미군 정규군이 영국 군을 유인해 전투가 벌어진다. 연대장 스코트는 오랜 동안 부하들을 훈련시켜왔고, 오합지졸 시민군을 예상한 영국 군은 스코트의 지휘에 따라 침착하게 사격을 퍼붓는 미군을 보고 당황했다. 그의 전술은 스페인에서 있었던 웰링턴 공작의 시스템을 따른 것으로 열을 지어 전진하는 적에 맞서 일렬로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것이었다. 스코트는 몇 가지를 더 발전시켜 연대를 대대로 나누어 좌우측으로 전진시켜 영국 군의 측면에 큰 피해를 입혔다. 소구경 포도 측면 공격을 적절하게 지원해주었다. 스코트가 착검돌격을 명령했을 때에는 이미 영국 군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 치페와 강 건너로 도망을 쳤고, 그 들이 있던 자리에는 515구의 시체와 많은 부상병이 남겨져 있었다. 이 승리로 스코트는 국가의 영웅으로 떠올랐고 전국의 모든 교회를 종을 울렸었다.

 

스코트는 베라끄루쓰를 점령한 후에, 트윅스 장군을 멕시코 국립 고속도로를 따라 잘라빠(Jalapa, 멕시코 시티까지 중간지점)까지 전진시켰다. 군의 선봉에 서고 싶어했던 워쓰는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코트는 그의 항의에 대해 군은 원래 순환지휘를 한다는 부드러운 설득을 했다. 워쓰가 그의 명령을 무시하고 베라끄루쓰를 전면공격하려고 했던 것에 대한 조치로 트윅스를 선택했다고 했지만 이제 더 이상 사이를 좋게 하기 위해 숨길 필요가 없었다.

트윅스도 작전수립 면에서는 워쓰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부하들에게 "벵갈 호랑이"로 알려진 그는 지적 능력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지만 부하를 휘몰아치는 것 만큼은 스코트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림 설명: 4월 17~18일 벌어진 쎄로 고르도 전투에서, 스코트는 멕시코 군이 기다리는 국립 고속도로 대신, 그들이 방심하고 있던 험로를 통해 좌측으로 우회공격합니다.

 

그 동안 멕시코 시티에서는, 정부의 최고 사령관인 안또니오 로뻬쓰 데 산따 아나(Santa Anna) 장군이 스코트가 수도 근처에 얼씬만 해도 박살을 내겠다고 장담하던 참이었다. 산따 아나는 독재자와 대통령 자리를 오가며 멕시코를 30년 동안 통치해오고 있었다. 이미지 변신의 귀재인 그는, 프랑스 군과의 전투에서 잃은 다리 하나를 국가에 몸을 받친 영웅으로 포장하는 재료로 사용해오고 있었다.

1845년의 혁명으로 쫓겨났던 그는 포크 대통령에게 미국과 잘 지내겠다고 설득해 멕시코에 돌아왔다. 멕시코 시티로 돌아가자 마자 외국인에 대한 전면전을 선포한 후에 최고 사령관의 자리로 복귀했다. 그는 25,000명의 병력을 모아 북쪽의 자체어리 테일러를 공격하려고 했다. 테일러는 스코트가 모든 정규군을 차출했는데도 명령을 어기고 몬터레이에서 부에나 비스따(Buena Vista) 마을로 진격을 하던 참이었다. 테일러는 웨스트 포인트 출신의 포병덕분에 산따 아나를 격퇴하기는 했지만 많은 피해를 입었고, 산따 아나는 승전을 주장하며 멕시코 시티로 돌아갔다.

국가영웅으로 이미지를 조작해 다시 군대를 모은 그는 국립 고속도로가 지나가는 험한 지형을 활용해서 스코트의 군대를 전멸시킬 수 있다고 장담했다. 산따 아나는 쎄로 고르도(Cerro Gordo, 영어로 Fat Mountain)가 있는 잘라빠(Jalapa) 아래의 60km 정도 되는 험난한 길을 노리고 있었다. 이 길은 엘 텔레그라포(El Telegrafo)라고도 알려졌는데, 해안부터 산맥을 거쳐 멕시코 시티까지 봉화를 올려 메시지를 전달했기 때문이다. 쎄로 고르도 몇 km 앞에는 3개의 절벽이 있는데, 공격 측에서는 반드시 이곳을 기어 올라야 쎄로 고르도를 공격할 수 있다. 다른 절벽은 리오 델 쁠란(Rion del Plan)에 있어서 여기를 건너는 것은 불가능했다.

산따 아나는 왼쪽이나 북쪽 측면만 걱정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 지역을 잘 아는 사람에 따르면 작은 수풀지대 속에 눈에 보이지 않는 협곡이 계속 펼쳐져 있어서 토끼조차 건널 수 없는 곳이라고 했다. 그 다음에는 북동쪽으로 언덕 위가 상당히 넓고 평평한 라 아딸라야(La Atalaya)가 있어서 이곳에 병사를 배치시켜야 했는데, 수풀지대와 협곡으로는 미군이 도저히 올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배치시키지 않았다. 반대로 초소에 배치된 24명조차도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쎄로 고르도의 정상에 큰 관측탑을 건설하고 여기에 멕시코 기를 게양했다.

이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약 12,000명의 병사를 배치시켰는데 대부분의 병사가 다시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후에 베라끄루쓰에서 풀려났던 병사들이었다. 부대의 훈련이나 사기는 둘째로 치더라도 군수품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아 당나귀로 이로 델 쁠란에서 물을 길어와야 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멕시코 군은 43문의 대포로 무장하고 있어서 국립 고속도로를 통해 전진하는 미군을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미군이 데이빗 트윅스의 전략을 따랐다면 산따 아나의 작전대로 들어맞았을 것이다. 트윅스는 모랫길을 따라 부하들에게 쉴 틈을 안주고 몰아붙였다. 30% 정도의 병력이 낙오되어 멕시코 게릴라의 사냥감이 되었다. 그러나 나머지 병력은 트윅스가 안띠구아(Antigua) 강의 다리를 건너기 전에 합류해서 쎄로 고르도에서 17km 떨어진 지점까지 전진했다. 쁠란 델 리오(Plan del Rio) 마을에서 후퇴하던 멕시코 군과 교전을 벌였다. 원래 이 멕시코 부대는 다리를 방어하기로 되어 있던 부대였다.

 

그림 설명: 용감하지만 구식이었던 트윅스 장군입니다. 그 때 당시의 주요 지휘관들은 구시대적 유럽식 정면충돌로 교육된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미군병사의 손실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미군 정찰병은 쎄로 고르도에 많은 수의 멕시코 군이 있다는 보고를 했다. 다리에서 멕시코 군을 쫓아냈듯이 이들도 쉽게 무찌를 수 있다고 자신한 트윅스는 그대로 부대를 전진시켰다. 실제로는 멕시코 군은 다리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우회되어 포위당하기 쉬웠기 때문에 일부러 후퇴해서 쎄로 고르도에 합류한 것이다. 트윅스의 부대가 산에 접근하자, 총탄과 포탄이 비오듯이 쏟아졌다. 트윅스는 급히 후퇴하면서 공병에게 상황을 알아보라고 명령했고, 멕시코 본대가 산에 있다는 보고들 받았다. 트윅스는 3일 안에 그들을 공격하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부대 전체가 할 말을 잊었다. 부하들은 트윅스의 작전능력을 믿지 않고 있었다. 사단병력은 겨우 2,600명의 보병, 경포 2문과 약간의 기병대뿐이었는데 공격이라니. 많은 병사들이 고향의 아내와 애인에게 작별 편지를 썼다.

 

사진설명: 미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휘관 중 한 사람인 리와 마지막 순간에 비극을 막은 패터슨입니다. 리와 그랜트 등의 전략의 귀재들은 이 당시에는 초급장교로 발언권이 거의 없었습니다.

 

때마침 패터슨(Patterson) 소장의 제2 사단이 도작해서 잠시 희망이 비쳤다. 그는 전투경험이 거의 없는 정치가로 스코트의 승인없이 공격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열병에 걸려 병석에 누워있었고 트윅스가 지휘권을 잡고 있었다. 트윅스는 4 14일에 공격을 개시한다. 그는 산따 아나의 우익에 대부분의 병력을 투입했는데, 여기는 산따 아나가 이미 절벽 위에 포대를 배치한 곳이었다. 트윅스는 보병만으로 포대를 장악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다른 한 편에서는 비오레가드(Beauregard) 중위가 멕시코 군의 좌익을 정찰하고 있었다. 수풀과 협곡을 헤치던 그는 라 아딸라야의 정상에 이르는 길을 발견했다. 그는 트윅스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지만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병상에 누워있던 패터슨은 비오레가드를 불러 트윅스의 작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를 물었다. 29살의 웨스트 포인트 출신인 그는 트윅스가 두려워 작전의 성공이 반반이라고 정치적으로 답변했다. 그는 포대에는 공격 움직임만 보여주고 전군이 쎄로 고르도의 멕시코 군에 집중해야 한다는 대안도 내놓았다.

트윅스와 정면충돌하고 싶지 않았던 패터슨은 병을 핑계로 비오레가드에게 작전취소 명령을 전달하라고 한다. 벵갈 호랑이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비오레가드는 패터슨의 명령을 아예 무시하고 자신의 대안을 전달한다.

트윅스는 잠시 동안 생각해보더니 너무 늦었다는 대답을 한다. 이미 명령을 내렸는데 다시 변경하면 그렇지 않아도 긴장한 병사들을 혼란에 빠뜨린다는 것이었다. 트윅스는 "어떻게든 성공할 것 같지 않은가?"라고 으르렁거렸다.

비오레가드는 "분명히 성공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면서 그대로 미심쩍은 부분은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고 소심하게 대답했다. 그렇지만 트윅스는 그 정도로 정교하지 못했다.

비오레가드가 재촉을 했던지 아니면 패터슨이 마음을 바꿨던지, 11시에 텐트에서 나온 패터슨은 지휘권을 발동시켜 스코트가 도착할 때까지 공격을 연기한다고 발표한다. 스코트는 다음 날 정오 무렵에 리(Lee) 대위와 히치콕(Hitchcock) 대령을 대동하고 캠프에 도착한다.

스코트가 모습을 나타내자, 트윅스의 작전에 불안했던 병사들은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스코트의 뒤로 제3 사단이 합류를 했고 그는 공격을 취소시키고 리에게 정찰을 명령했다.

비오레가드는 멕시코 군의 좌익에 구멍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리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로 한다. 잡목에 찔리고 구르면서 정보를 확인한 그는 도로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몇 시간 더 고생을 한 끝에 그는 남쪽으로 나 있는 길을 발견하는데, 그 길은 바로 멕시코 군의 좌익의 배후를 찌를 수 있는 길이었다. 마침 멕시코 군이 샘에 물을 길러 왔기 때문에, 그는 밤까지 기다려서 귀대할 수 있었다. 리는 자신의 정보가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에 염려스러웠지만, 스코트는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고지대의 선선한 기온 덕분에 황열병 염려없이 마음대로 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다음 날, 스코트는 리와 공병대를 보내 수풀지대에 길을 내게 한다. 리는 이번에는 좀 더 북쪽으로 올라가기로 한다. 공병대는 마차와 포대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길을 만들어냈고 "둘레길(The Trail)"이라고 불렀다.

 

공격준비가 다되었다. 스코트는 트윅스에게 우회기동의 선봉에 설 수 있는 영광을 주었지만 리 대위를 붙여 조언을 하게 했다. 그리고 트윅스의 부대에 지원병 여단을 합류시켜 전력을 보강했다. 4 17일 토요일 오전 4 30, 트윅스는 국립 고속도로로 진입한 다음 리가 개척한 둘레길로 들어섰다. 라 아딸라야까지 7km를 전진하는데 4시간이 걸렸다.

쎄로 고르도에 관측탑을 세운 덕분에, 멕시코 군은 미군이 우회기동하는 것을 미리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라 아딸라야를 점령하려는 트윅스에 맞서 병력을 보내 맞서게 했다. 호전적인 트윅스는 여단 병력 전부를 보내 언덕을 방어하게 했는데, 그만 누군가가 트윅스에게 얼마나 더 전진하면 좋겠느냐는 어리석은 질문을 하고 만다.

"지옥 끝까지 쫓아가!"라고 소리를 질러댔고 리가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병사들은 산등성이를 뛰어 내려가 퇴각하는 멕시코 군을 좇아 쎄로 고르도 절반 거리까지 따라갔다. 당연히 멕시코 군의 엄청난 포격이 쏟아졌고 다행히도 피해가 크지는 않았지만 바위와 나무 뒤에 숨어서 해가 저물 때까지 꼼짝도 하지 못했다.

트윅스의 구시대적 리더십은 의외로 스코트의 의도를 숨겨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날 밤, 산따 아나는 미군의 주력공격을 분쇄시켰다고 생각하고 상상 속의 승리를 자축하는 파티를 열었다. 그 동안 미군은 둘레길을 따라 대포를 옮기고 있었다.

 

그림 설명: 멕시코 군이 천혜의 방어물이라고 생각했던 험로를 개척해 전진하고 있는 미군입니다.

 

율리시즈 그랜트(Ulyssess Grant, 이후 북군의 총사령관) 중위는 워쓰 사단의 연대 보급소에서 밑바닥 일을 하고 있었는데, 리 일행이 험난한 지역으로 대포를 옮긴 노고에 대해 극찬하는 글을 남겼다. 미군의 대포는 순전히 인력으로 협곡을 오르내리며 이동을 했는데 그것도 별 빛밖에 없는 한 밤중에 이동했다. 리 대위는 낮에 있었던 전투때문에 피곤했을 텐데도 잠을 자지 않고 밤의 대포 이동을 지휘했다. 리의 초인적인 노력덕분에 귀중한 대포들이 라 아딸라야 정상에 설치되어 다음 날 전투에 사용될 수 있게 되었다.

기습을 노릴 수 없게 된 스코트는 우회공격과 전면공격을 동시에 진행하기로 결정한다. 리에게 두 개의 여단을 맡겨 멕시코 군의 배후 깊숙이 침투하게 했고, 트윅스의 나머지 사단병력은 측면에서 쎄로 고르도를 공격하고 다른 연대는 중앙공격을 하기로 했다. 미군의 좌익 가장 끝에서는 또 다른 여단이 절벽 위의 3개 포대를 공격하기로 했다.

해가 떠오르자, 라 아딸라야의 미군 포대가 포문을 열어 쎄로 고르도의 방심하고 있던 멕시코 군을 두들겼다. 산등성이를 올라가는 미군의 등 뒤에서는 트윅스의 고함 소리가 울려퍼졌다. 중앙에서는 패터슨 사단이 다른 포대의 지원을 받으며 전진하고 있었다. 왼쪽의 공격만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었다. 지원병 여단의 지휘관 필로우(Pillow)가 참모의 조언을 무시하고 3개 포대에서 직격탄이 쏟아지는 지점을 집합지로 선택했다. 그렇지 않아도 포화때문에 제대로 대열도 갖추지 힘든 판에 그만 필로우가 파편을 맞고 팔이 날아가 지휘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패터슨과 트윅스의 부대가 쎄로 고르도 정상에 접근해 근접전을 펼치고 있는 동안, 리의 2개 여단은 국립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멕시코의 포대 하나가 잠시 1개 여단을 제압했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수풀지대에서 미군이 나타나자 그렇지 않아도 지리멸렬한 멕시코 보병이 무너져내렸다. "양키다! 도망쳐라" 그들은 소리지르며 오른쪽의 강으로 도망쳤다.

멕시코 우익의 포대의 포병도 도망치면서 그 때까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던 필로우의 부대도 공격에 가세했다. 쎄로 고르도와 곳곳에서 멕시코 군이 수 백 명씩 항복했고 나머지는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산따 아나는 당나귀에 재빨리 올라타고 도망치는 부하들의 뒤를 따랐다. 그는 군자금뿐만 아니라 그렇게 아끼던 의족도 미처 챙기지 못했다. 미군이 주어든 의족은 시카고로 보내져 몇 년 동안 전시되는 처지가 되었다. 멕시코 군 하나가 산따 아나가 버린 군자금 마차를 몰고 달아나려고 했지만 리의 부대에 막혀버렸다.

 

그림 설명: 그림이니까 가능한 얘기이겠습니다만, 윌리암 하니 대령이 여단을 이끌고 멕시코 진지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아래는 도망치는 산따 아나에게 미군이 의족을 흔들며 야유하고 있습니다. 그림은 클릭하면 커집니다.

 

미군의 완벽한 승리였다. 멕시코 군은 완전히 와해되었고 스코트는 3,000명이 넘는 포로를 잡았으며, 멕시코 전사자는 최소한 1,200명이 넘었다. 스코트는 겨우 30명의 장교와 387명의 병사를 잃었는데 그 중에 전사자는 64명에 불과했다.

전투가 완전히 끝나자, 스코트는 말을 타고 몇 명의 참모와 함께 순시를 했다. 기세가 오른 병사들은 그의 주변에 몰려들었고 장군은 병사들과 악수를 나누며 그들의 노고를 치하했다. 너무 많은 병사들이 몰려들자, 그는 어쩔 수 없이 연설을 시작했고 ""형제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보여준 용기에 대해 감사하며 절대로 잊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을 맺었다.

 

베라끄루쓰로 향하는 전초전인 쎄로 고르도에서 윈필드 스코트는 전통적인 용기에 의존하지 않고 작전중심의 전투로 미군의 전투술의 기초를 닦았다. 철저한 정찰, 우회기동, 포병을 동원한 화력전을 유기적으로 결합시켰다. 그리고 그 목표는 피해의 최소화였다.

몇 개월 후에 벌어진 멕시코 계곡의 꼰뜨레라스(Contreras) 전투에서 도, 스코트는 쎄로 고르도의 작전능력을 다시 보여줬다. 이번에는 산따 아나는 좌익은 도저히 통과할 수 없는 사막 황무지로 보호받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리는 철저히 정찰한 후에 가능한 경로를 그림으로 그려 보고했다. 스코트는 500명의 병력을 동원해 길을 열었고 우회공격으로 전투 17분 만에 꼰뜨레라스에서 멕시코 군을 몰아냈다.

스코트는 겨우 12,000명의 병력으로 멕시코 수도를 궁지에 몰아넣고 평화협상을 끌어내 전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그의 작전능력은 웨스트 포인트 사관학교 출신의 참모들의 도움으로 완성되었고 많은 장교들에게 전수되었다. 토마스 "스톤웰" 잭슨(Thomas Stonewell Jackson, 남군 초기의 유명한 장군)이 로버트 리에게 챈스러즈빌(Chancellorsville)에서 북군을 우회하겠다는 위험한 작전을 제안했을 때에도, 멕시코 전쟁에서의 경험에 따라 승인한다.

쎄로 고르도에서 당나귀나 돌봤던 그랜트도 우회기동에 대해 배워, 1864년 오버랜드(Overland) 작전에서, 병력을 계속 좌측으로 이동시켜 남군의 측면을 돌파하려고 했었다. 반면에 리도 병력과 포대를 계속 이동시켜 남군과 북군은 결국 리치몬드에서 피터스버그까지 펼쳐진 참호에서 대치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우에스기 왈: 이후 멕시코는 수도까지 점령당해 과달루뻬 이달고 조약을 맺고, 미국은 1,825만 달러라는 거금을 주고 뉴멕시코, 캘리포니아, 콜로라도를 매수하게 됩니다. 전쟁에서 이겼는데도 필요한 영토를 대가를 지불하고 구입했으니 역시 미국답구나 할 수도 있겠지만, 이 돈으로 획득한 땅이 남북한 합친 한반도의 15배가 됩니다.

그래서 미국 내에서도 반대여론도 적지 않았고 일부 지식인은 기꺼이 투옥되는 것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미국은 알라모 전투로 텍사스를 얻었고 이 전투로 미국에서 가장 값진 영토를 얻게 됩니다.)

 

다음은 참고 자료로 Osprey 출판사의 자료를 인용했습니다. Osprey 출판사는 전사 전문 출판사로 유명한 전사를 이해하기 쉬운 그림과 도해로 잘 설명한 시리즈로 유명합니다. 지금까지 최소 400권 이상이 출판되었고 저도 전체 수집을 포기할 정도의 너무 큰 부담이니까 여러분은 그냥 제 글로 참으시기 바랍니다. Osprey 출판사의 도서에 지출한 돈만 3백만원 가까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지금은 작은 집으로 이사해서 그냥 종이 박스에 모두 봉인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가장 아래에는 멕시코 전쟁에 대한 보기 드문 영화입니다. 영어권 영화이면서도 멕시코 관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다 정확하게는 종교와 출신차별에 갈등을 겪은 아일랜드 출신 하사관이 동료와 함께 멕시코로 투항해서 장교로 최선을 다하는 영화입니다.

소리높여서 여유있게 즐겨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별다른 설명없이 시각자료만 첨부하겠습니다. 모든 그림 클릭해서 즐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