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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705

전차병 이야기 (7부) - 기병 대 전차 논쟁 대전 초까지 영국, 프랑스, 독일 국내상황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이어지는데 너무 늘어져서 많이 줄이고 뛰어 넘어갑니다. 24살의 버트 렌델은 1936년에 인도된 56대의 신형 비커스 마크 VI (6톤 또는 마크 E)경전차에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접차병 2명이 탑승했는데 '사수와 운전병은 무전기를 조작하고 장전 및 사격을 동시에 할 수 없었다'고 불평했다. 부실한 설계에도 좌절했다. 렌델은 '이전 전차들에 비해 발전이 전혀 없었다'고 결론내렸다. 폴란드군은 이미 1931년에 비커스전차 38대를 영국에 주문했고 아예 생산 라이센스를 구입했을 정도로 전차전력 보강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래의 7TP 전차때문에 자체생산은 하지 않았습니다. 국내에 퍼진 일부 왜곡때문에 폴란드 창기병 운운하는 사람들.. 2023. 6. 26.
전차병 이야기 (6부) - 스페인내전 한 영국 신병은 ‘완전히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처음 몇 주 동안은 단 한순간도 평온한 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아침 6시 30분에 기상해서 나무로 막사를 지은 기본캠프에서 대야를 두고 너무 많은 사람들과 항상 경쟁해야 했고 찬물이었다. 아침식사는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린 후 급하게 먹었다. 1930년대 초 R.W. 먼스는 ‘내 기억으로는 베이컨 한 조각에 달걀 프라이를 얹고 그 위에 빵 두 조각, 차 한 잔, 마가린 한 스푼을 얹은 것이 전부였다’고 회상했다. 0730시부터 아침훈련을 시작했다. 운이 없는 병사들이 행정업무를 맡았다. 그래도 하루하루가 계획적이고 알찬 하루였다. 저녁에는 다음 날의 훈련과 교육을 준비하고, 장비와 군화, 소총을 세척하면서 보냈다. 매일 저녁 9시 30.. 2023. 6. 19.
전차병 이야기 (5부) - 전차병의 진화 전차전술과 신병훈련에서 독일이 영국과 프랑스를 완전히 추월하기 시작합니다만, 전차성능에 대해서는 대전차전이 불가능할 정도로 뒤처져 있는 상태입니다. 전차병선발과 훈련은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고 국가마다 다른 방식을 사용했다. 영국전차병 중에는 어느 정도 기술력을 갖춘 사람도 많았지만, 압도적인 다수가 실직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입대한 사람들이었다. 1933년에 입대한 빌 클로즈는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30년대에 불황이 극심했고 작은 시골 마을에서는 희망이 없었기 때문에 군대가 좋은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3개월 동안 실직 후 전차부대에 입대한 또 다른 병사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말했다. '내가 살던 북부마을에서는 일반 성인인구의 절반이 실직 상태였다'고 말했다... 2023. 6. 14.
전차병 이야기 (4부) - 전차시대의 진화 긴 설명을 줄이다 보니 조금 혼동되는 부분이 있기도 합니다.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면 영국은 세계최초의 기계화부대를 편성하고 전차부대에 대한 혁신이론을 정리했지만 결국에는 보병지원 무기로 남게 되었고, 반대로 독일은 히틀러와 구데리안 등이 전차의 가치를 인정하면서 2차대전 전격전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전쟁으로 가속화된 기술이 세상을 바꾸고 있는 동안, 직업군인들은 기존 장비와 줄어든 예산으로 만족해야 했다. 공장에서 값싼 자동차가 쏟아져 나오면서 말과 마차보다 더 많은 수의 자동차가 생산되었다. 1924년 헨리 포드의 모델 T 생산량은 2,400만 대까지 늘어났지만, 종전후 전차는 반대로 20개 대대에서 4개 대대로 축소되었다. 1919년 12월 17일, 군수부 참호전 및 보급 책임자였던 루이스.. 2023. 6. 11.